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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악인 이협우 경주 3선 국회의원이 되다

칼 럼
경주시민신문 기자 / lnews@lnews.tv입력 : 2020년 03월 29일
칼 럼

대한민국 악인 이협우 경주 3선 국회의원이 되다


임종금 기자가 2016년에 쓴 『대한민국 악인열전』에는 주로 해방 전후를 기해 잊지 못할,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악인 8명의 행적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민족적 반역자이자 살인마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들에 의해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두 눈 부릅뜨고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향사람 200명을 무참히 학살한 이협우> <일제시대 고문기술 70%를 개발한 노덕술> <민간인·부하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을 죽인 김종원> <일본 국회의원이 된 깡패출신 친일파 박춘금> <안두희를 ‘안 의사’로 불렀던 이승만의 양자 김창룡> <일제가 동상까지 세워준 친일파 김동한> <어린 학생도 고문한 악질 친일헌병 신상묵·박종표> 등 8명의 악인의 죄상을 적고 있는데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이협우’라는 자가 경주 내남면 출신이다. 

70세 이상이면 대게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협우는 경주에서 제2대에 이어 3대, 4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최근에도 중앙언론 등에서 그의 천인공노할 죄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여러 곳에 잘 나와 있다. 이협우는 왜 고향의 양민 200명을 무참히 살해했을까? 그런 그가 어떻게 경주에서 3선 국회의원이 되었을까? 그런데도 어떻게 편안하게 자연사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천벌도 받지 않고 현실에서도 벌을 피해 가면서 말이다.

이협우는 내남 망성리에서 1921년에 태어났으니 지금 살아있으면 꼭 100세가 된다. 일제시대에 대구농림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밥은 먹고 살만한 집안이고 머리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출세를 위해 만주에 갔으나 여의치 않았던지 1943년 고향 내남으로 돌아와 농업기수(면 서기)를 지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잠시 면서기를 했기에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일부 좌익세력이 경주 일대를 습격하여 쌍방 5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경찰서까지 잠시 좌익의 손에 점령되기도 했다. 이른바 10.1 사건이었는데 이후 1948년, 정부는 우익세력의 필요성에 따라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는데 이협우가 내남면 단장을 맡았다. 

이들에게는 총과 무기도 지급되었다. 이협우의 나이 28살 때였다.
이 때부터 이협우의 광기에 찬 살륙이 전개되었다. 사적인 감정이 있거나 재산이 탐나거나 하면 청년단에 비협조적인 빨갱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철저하게 죽였다. 아마 후환이 두려워서였을 게다. 심지어 자신이 구애한 처녀가 거절했다는 이유로 처녀의 일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경주군은 이협우의 왕국’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내남에는 이협우가 양민을 집단사살한 곳이 몇 곳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용장 골짜기다. 2015년 황성공원에 해방전후 민간인 학살 위령비가 세워졌는데 지역별로 나눠보면 내남면 출신이 가장 많은 이유도 이협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피해자 이름만 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이협우는 1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6가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도 이협우는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양민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이 때는 최 씨와 권 씨가 특히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부끄러운 우리나라 역사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만만치 않는 상대가 출현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손과 발을 모두 묶어 천장에 매달고 고문하는 속칭 ‘비행기 고문’의 창시자인 친일 경찰 출신 서영출 후보와 힘겨운 싸움 끝에 겨우 천 표 차이로 누르고 가까스로 당선됐다. 서영출 후보는 청년들을 교사하여 독립운동가 최순 선생을 사살한 사람이었다. 천하의 악인과 악질 친일파 두 사람이 나란히 1.2등을 했다.

이협우는 고향 경주에서는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면서 갖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국회에서는 존재감이 아예 없었다. 벙어리 국회의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딱 한 마디는 했다고 한다. 장면 부통령의 발언을 트집 잡아 자유당에서 이의를 제기하던 와중에 “처리해버려, 처리해버려”라고 고함친 게 3선 의원생활 동안 한 발언의 전부였는데 당시 패기만만했던 김영삼 의원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자 고개를 푹 숙이고 움츠렸다고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릇의 한계였던가. 강한 자에게는 한 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 없이 강한 사람이었다.

1958년 사라호 태풍으로 영남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던 해 또 3선에 도전했는데 당시에는 권총을 들고 다니며 다른 후보들을 위협하거나 등록을 못하게 하는 등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42.81%의 높은 득표율로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신문에는 3장이나 7장의 투표용지를 갖고 투표하는 일도 있었다는 기사로 보아 부정선거를 한 것 같지만 ‘악랄한 이협우를 서울로 보내버리자’는 민심이 득표에 도움이 되었다는 뒷말도 있다. 당시에는 드문 3선 국회의원지만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다. “4대 국회에서는 한 마디 하실겁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10년 동안 국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자유당의 난투극에서는 항상 몸으로 앞장섰다. 그의 인생에서 딱 하나 재수 없는 일은 4.19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된 것이었다.

4.19혁명 후 억울하게 학살당한 유족들이 1960년 6월 16일 고소를 했는데 대구지검 최찬식 검사가 의욕적으로 수사하여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61년 5.16이 일어나면서 반공을 국시로 한 혁명정부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정말로 재수 좋은 사나이였다. 이 후에도 유족회에서 다시 고소를 했으나 반민특위에서 또 다시 무죄석방되었고, 이협우를 고소한 유족회 회원들만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좌익 누명을 쓰고 갖은 고초를 당했다. 정말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불과 60년 전 일이다.
대한민국 악인 이협우는 여생을 편안히 살다가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에 67세의 나이로 성동동 장미아파트에서 자연사했다. 이협우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법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그가 2,3,4대 경주출신 국회의원 이협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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