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안강읍 두류공단에 추진되던 산업폐기물 매립장 사업이 또다시 자진 철회됐다. 표면적으로는 시민의 반대와 행정 검토 결과에 따른 수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철회가 아니라 행정 절차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심각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철회의 핵심 쟁점은 ‘도시계획위원회 자문 결과의 사전 유출’이다. 경주시 도시계획과는 비공개가 원칙인 위원회 자문 결과를 용역사에 구두로 전달했음을 인정했다. 문제는 이 용역사가 해당 산업폐기물 처리업체와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기관이라는 점이다. 결국, 자문 결과는 사실상 사업자에게 전달된 것이며, 그로 인해 사업자는 불리한 행정 판단이 내려지기 직전에 스스로 사업을 철회하는 ‘전략적 후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실수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다. 도시계획위원회 회의는 조례에 따라 비공개로 운영되며, 회의록조차도 심의 종료 후 30일이 지나야 공개된다. 이는 사업자와의 유착 또는 특혜 논란을 방지하고 행정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그런데 경주시는 이를 스스로 허물어버렸다. 해당 사업자가 자문 결과를 미리 파악하고 철회→보완→재접수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정한 행정의 원칙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시민들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데 있다. 주민들은 2021년과 2023년 두 차례에 걸친 같은 사업자의 반복된 시도에 이미 피로감을 넘어선 분노를 표출해왔다. 특히 이번에는 자문 내용의 사전 유출 정황이 확인되면서, 단순한 행정 판단을 넘어 ‘행정이 특정 사업자 편에 섰다’는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시민들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폭염 속에서도 시청 앞에서 시위를 이어왔다. 그러나 정작 행정은 주민들에겐 조례를 이유로 정보공개를 거부하면서, 사업자에겐 구두로 주요 판단 내용을 전달했다. 이는 명백한 이중 잣대이자, 특혜성 정보 제공이다.이강희 시의원이 지적했듯, 수많은 주민이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사업자만이 내부 정보를 얻어 먼저 움직일 수 있었다면, 이는 공공행정의 신뢰를 해치는 중대한 문제다. 특히 산업폐기물 매립장이라는 고위험·고민감 사업에 있어 이러한 절차적 불공정은 더욱 큰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리는 과거 상호명을 바꿔가며 같은 부지에 반복적으로 사업을 시도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민 반대와 행정 판단을 넘기 위해 다른 전략을 시도해왔다. 경북도의 행정심판 결과에 따라 형식적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해도, 주민 수용성 없는 사업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은 이미 전국 곳곳에서 확인된 바 있다.   경주시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자문 결과 사전 유출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내부 감사가 이뤄져야 한다. 누구의 지시에 따라 어떤 경로로 정보가 전달되었는지, 향후 동일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향후 유사한 사업 제안이 있을 경우, 시민 의견 수렴을 전제로 ‘즉각 불수용’ 방침을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폐기물 매립장 사업이 반복적으로 검토 대상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에게는 큰 고통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정의 신뢰 회복이다. 시민은 행정의 결정에 협조할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그 전제는 ‘공정성’과 ‘투명성’이다. 이번 사안을 단순한 절차 종료로 덮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정 전반의 신뢰 회복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자진 철회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