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거대 보험사와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가입자들은 억울함을 사실상 호소 할 곳이 마땅 하지않다. 평생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부할 때는 당장이라도 모든 생계와 위험을 책임져줄 것처럼 다가오던 보험사들이, 막상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시점이 오면 안면을 몰수하는 씁쓸한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사망보험금 분쟁의 `불편한 진실`이다.사망보험금을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단연 `사망 유형의 분별`이다. 유족은 억울한 죽음을 증명하려 하지만, 보험사는 어떻게든 지급액을 줄이거나 면책(지급 거절) 사유를 찾기 위해 고인의 죽음을 차갑게 해부한다. 가장 대표적인 갈등은 `일반사망(질병사망)`과 `상해사망(재해사망)`의 경계선에서 발생한다. 상해사망보험금은 일반사망보험금에 비해 보상액이 훨씬 크다. 이 때문에 교통사고나 낙상 등 명백한 외부 요인으로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사는 고인이 생전에 앓고 있던 `기왕증(과거 질병)`을 트집 잡아 상해사망이 아닌 질병사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우리 지역 경주의 농어촌 마을에서도 이런 비극은 흔하게 일어난다. 평생 밭일과 바닷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불의의 낙상 사고나 농기계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유족은 당연히 재해사망보험금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보험사 보상과 직원은 "어르신이 평소 앓고 있던 고혈압이나 관절염 등 기왕증이 사망의 주원인"이라며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이민다. 읍면동 단위의 정보 소외 계층인 이들에게 수십 장의 깨알 같은 보험 약관과 법률 용어는 거대한 장벽이다.특히 `자살`을 둘러싼 보험금 분쟁은 유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원칙적으로 자살(고의적 사고)은 사망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와 약관에 따르면 극심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심신상실 상태`에서 비롯된 극단적 선택은 재해사망으로 인정받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보험사는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고인의 정신과 진료 기록을 이 잡듯 뒤지며 `스스로 선택한 죽음`임을 입증하는 데 혈안이 된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유족들에게, 고인의 고통을 서류상 수치로 증명하라는 보험사의 요구는 폭력이자 2차 가해나 다름없다.이 과정에서 보험사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무기가 바로 `의료자문` 제도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여실히 드러난다. 보험금 지급 거절 사유 중 무려 67.4%가 `주치의 진단·치료 불인정`에서 비롯됐으며, 이 중 70%가 의료자문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고인을 직접 수술하고 임종을 지킨 종합병원 주치의의 소견조차 무시당하기 일쑤다. 의료자문 관련 분쟁에서 유족이 지급 거절당한 보험금은 평균 1618만 원에 달했다.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분 뒤에 숨어, 보험사가 의뢰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자문의의 서면 소견서를 보험금 삭감의 `합법적 칼`로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루한 지급 지연 작전은 거대 자본이 서민을 굴복시키는 가장 흔하고도 치명적인 수법이다. 장례비와 당장의 생계비 등 경제적 벼랑 끝에 몰린 유족에게, 보험사는 추가 조사를 핑계로 지급을 무기한 보류하거나 턱없이 낮춘 합의금을 제안한다. 수년이 걸리는 소송전을 버텨낼 재간도, 법적 지식도 부족한 서민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보험사의 반쪽짜리 합의안에 도장을 찍고 만다.보험은 만인의 상부상조를 위해 탄생한 사회적 안전망이자, 국민과 기업 간의 엄중한 약속이다. 기업의 이윤 추구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그것이 약자의 눈물을 쥐어짜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은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의료자문 제도의 객관성을 담보할 독립적인 제3의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 정당한 사유 없이 보험금 지급을 악의적으로 지연하는 보험사에 대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등 강력한 철퇴를 가해야 할 때다.약관의 모호함을 핑계로 고인의 죽음을 저울질하고, 목숨값을 흥정하는 비정한 관행은 이제 끊어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을 잃은 슬픔마저 자본과 법리적 다툼으로 증명해야 하는 잔인한 사회에서, 남겨진 이들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주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