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APEC 정상회의 개최 도시’ 경주. 세계 21개국 정상들이 찾을 이 도시가 지금 도로 한가운데 놓인 전신주 하나 때문에 공사가 멈춰섰다. 경주시가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추진 중인 용강네거리 도로확장 사업이 한전 전신주 이설 지연으로 3개월째 중단되면서 시민 불편과 행정 신뢰 하락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용강네거리~청강사네거리 540m 구간을 기존 20.6m에서 24.1m로 확장하는 이 사업은 총 18억 7천만 원의 시비가 투입되는 주요 기반시설 공사다.     특히 경주시가 APEC을 계기로 도시 인프라를 정비하려는 대표 사업 중 하나다. 그러나 문제는 사업 시작 초기 단계부터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경주시는 한국전력에 전주 이설을 처음으로 요청했고, 올해 2월과 4월에도 두 차례 추가 요청하며 이설을 재차 촉구했지만, 한전 측은 별다른 이행 없이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 공사는 2025년 3월부터 전면 중단됐다.경주시 관계자는 “오는 6월까지 한전 전주 이설이 완료되지 않으면, 도로 공사는 예정대로 추진하고 전주 이설은 별도로 하겠다는 입장을 한전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신주가 서 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도로공사는 공사 안전성 확보가 어렵고, 결국 이설 시 다시 공사면을 파헤치는 이중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이로 인한 예산 낭비와 공정 비효율은 고스란히 시민의 몫이다.   시민 불편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공사 구간은 차량 통행량이 많은 주요 시가지로, 도로 폭이 좁아진 데다 공사 장비와 구조물이 방치되면서 보행자와 차량의 혼잡이 심화되고 있다. 용강동 주민 김모 씨(49)는 “정상회의를 준비한다면서 시민들이 다니는 길 하나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전신주 하나 옮기지 못해 공사가 멈춰 있는 걸 볼 때마다 황당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전의 전신주 이설 지연 문제는 비단 경주만의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영광군, 영동군 등 전국 곳곳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며 공공사업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공공기관 간 협조 부족과 절차 지연, 행정 비효율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수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사업이 표류하는 것이다. 영동군 지촌~남전 간 군도공사 역시 22개의 전신주 이설이 지연되면서 공사 준공이 수개월 넘게 미뤄졌고, 이로 인한 지역사회 불만이 고조된 바 있다.   경주시 역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강제력 없는 요청만 되풀이하는 현실 속에 대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관 간 협조 체계가 부실하다면 지자체가 직접 나서서 범정부적 조율을 요청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공사 지연이 장기화되면서 건설업체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현장 관계자는 “이설만 완료되면 1개월 안에 마무리할 수 있는 공사지만, 이대로 가면 시공 인력 유지비 등 추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자재 보관, 장비 이동, 안전 관리 등에서도 비용이 계속 늘고 있다”고 호소했다.   정상회의는 도시 브랜드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만, 기본적인 행정과 시설 관리조차 원활하지 않다면 이 모든 준비가 빛을 잃는다. 전신주 하나 이설하지 못해 멈춘 공사. 그 뒤에 감춰진 비효율과 무책임이야말로 경주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진짜 위험 요소다.‘세계가 찾는 도시’를 외치기 전, 시민이 먼저 걷고 다닐 수 있는 길부터 제대로 정비하는 것. 그것이 진짜 국제도시의 출발점 아닐까. 글 이종협(경주시민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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