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한수원 본사가 양북(현 문무대왕면) 장항리 골짜기에 터를 잡기로 한 것은 당시 경주 사회 지도층과 지역사회가 치열한 논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수원 본사는 여전히 들판 한가운데 서 있고, 지역사회는 여전히 갈라져 있다. 선거철만 되면 시내권 정치인들은 본사 이전을 경주 발전의 만능열쇠인 양 외치고, 문무대왕면 주민들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이를 저지하는 소모적 대립이 반복되고 있다.우리는 이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수원 본사가 위치한 동경주 지역은 이미 문무대왕과학연구소, SMR 국가산업단지, 중수로해체기술원, 월성원전과 방폐장 등이 집적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원자력 산업의 심장부로 변모했다. 지자체 스스로도 이곳을 거대 에너지 클러스터로 조성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클러스터의 핵심 관제탑이라 할 수 있는 본사만을 굳이 시내권으로 떼어내야 할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다.정치권이 주장하는 이전 명분은 이미 그 유효기간이 다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부족한 사무 공간 해소와 원전 수출 사업을 위한 유관 기관과의 소통 등이 부분 이전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최근 원전 수출 사업의 주도권이 한전으로 조정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명분마저 희미해졌다. 2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혈세가 투입되는 사업을, 실익도 명분도 없는 상태에서 밀어붙이는 것은 명백한 행정력 낭비이자 시민 기만이다.국가 공기업의 본사 위치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장기판의 말이 아니다. 매번 선거 때마다 `표밭 다지기`용으로 등장하는 한수원 본사 이전 공약은 오히려 지역 간 갈등만 부추기고 경주의 통합을 가로막고 있다. 진정으로 경주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과거의 결정에 발목 잡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조성 중인 동경주 에너지 클러스터의 시너지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이제 시민들은 선거용 구호의 허상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얄팍한 정치적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경주의 실질적인 백년대계다. 현상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는 혜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더 이상 한수원 본사를 정치적 볼모로 삼는 구태 의연한 행태는 멈춰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