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청 공무원들의 속내가 익명 설문을 통해 드러났다. 전국공무원노조 경주시지부가 주관한 ‘좋은 직장 만들기 프로젝트’ 설문조사는, 단순한 내부 불만 수렴을 넘어 지금의 경주시 공직사회가 어떤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특히 ‘공정하지 않은 인사’, ‘소통 부재’, ‘기본조차 무너진 직장문화’에 대한 피로감과 절망감은 이제 단순한 민원이 아니라 공직사회의 건강성을 갉아먹는 구조적 리스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설문에 참여한 조합원 253명의 의견 중 자유서술형 응답이 전체 40%를 넘겼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평소 말할 수 없던, 아니 말해도 반영되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익명’이라는 최소한의 보호 아래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경주시가 ‘듣는 조직’으로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반증한다.
특히 시의원과 시장에 대한 쓴소리는 단순한 불만 표출이 아니라 ‘동행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간절한 요청에 가깝다. 시의원들에게는 민원성 압박과 자료요구 남발을 자제해달라는 목소리가 컸고, 시장에게는 “모든 성과를 자신의 치적으로만 소비하지 말라”, “현장 업무 현실과 괴리된 포퓰리즘 정책은 결국 실무자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목소리가 반복됐다.
경주시의 인사제도에 대한 평가는 더 혹독했다. “연공서열 중심의 승진은 불공정하다”, “전보 인사에도 기준이 없다”는 목소리는 직장 내 신뢰 기반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준다. 승진과 인사에서의 불신은 결국 조직 내 동기부여를 무너뜨리고, ‘출세하려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왜곡된 조직 문화만 남긴다.
간부와 중간관리자들에 대한 내부 평가는 더욱 뼈아프다. “부하를 자신의 실적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지시는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회식과 인맥 중심의 정치로 일의 본질을 흐린다”는 지적은, 그동안 경직된 수직적 문화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아온 실무자들의 집단적 피로감의 결과다.
일선 실무자 간에도 갈등은 존재했다. ‘전화 안 받기’, ‘인사 안 하기’, ‘업무 떠넘기기’ 같은 기본적인 태도의 결여가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세대 간 갈등 역시 복합적 양상이다. MZ세대는 소통을 요구하고 기성세대는 조직을 중시하지만, 어느 한 쪽의 목소리만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중요한 건 상호존중과 기본 예의, 그리고 협업의 원칙이다.
이번 설문조사는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의 신호다. 시민과 함께 일하고, 시민을 대신해 일하는 공무원들이 스스로를 소외된 존재로 느낄 때, 행정서비스의 질도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시민 중심 행정’은 결국 ‘공직자 중심 존중’과 함께 갈 때만 실현 가능하다.경주시는 지금이야말로 조직 내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시점이다. 인사 제도의 공정성 강화, 간부의 책임행정 정착, 세대 간 갈등 해소, 기본에 충실한 조직문화 복원, 그리고 실질적인 소통창구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노조가 언급한 복지혜택의 공정 분배, 고충 처리시스템 구축 등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
공무원도 결국 ‘사람’이다. 존중받지 못한 조직에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기대하긴 어렵다. 조직의 건강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은 결국 ‘공정한 인사’와 ‘듣는 리더십’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좋은 직장’, 그것은 외부의 홍보물이 아니라, 내부의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