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열린 ‘APEC 문화산업고위급대화’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역사상 최초로 문화산업을 핵심 의제로 격상시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지난 1989년 출범 이후 APEC은 주로 무역, 경제 협력, 디지털 전환, 환경과 지속 가능성 같은 의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왔다. 그러나 이번 경주 회의는 문화산업을 단순히 부수적 산업이나 교류의 도구가 아닌, 미래 성장의 동력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동 성명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문화는 한 나라의 정체성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창이며, 동시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자원이다. 특히 K-팝, K-드라마, K-뷰티, 한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문화콘텐츠는 이미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며 막대한 경제적 파급력을 입증해왔다. 이번 회의에서 문체부 최휘영 장관이 제시한 ‘문화창조산업, 번영을 위한 새로운 지평’이라는 주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문화산업이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AI) 혁신의 물결 속에서 더욱 강력한 성장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강조한 선언이었다.   회의는 ‘연결, 혁신, 번영’이라는 세 개의 분과로 진행됐다. 첫째, 문화산업을 경제협력의 새로운 촉매제로 삼아 지역 성장을 촉진하는 ‘연결’의 가치가 강조됐다. 이는 문화가 더 이상 소비재의 차원이 아니라 일자리 창출, 관광 활성화, 연관 산업 성장 등 국가경제에 직결되는 영역임을 보여준다. 둘째, ‘혁신’ 세션에서는 AI와 디지털 기술이 문화창조산업 전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며, 기술이 창작과 유통, 향유 방식까지 변화시키는 구체적 사례가 소개됐다. 셋째, ‘번영’ 세션에서는 교육, 훈련, 모범사례 공유를 통해 문화산업이 아시아태평양 공동체 전체의 번영을 이끌 수 있다는 전망이 제시됐다. 회의 결과 채택된 공동 성명은 문화산업의 경제적 중요성을 명확히 규정하고, 디지털·AI 기반 혁신을 통한 협력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경주의 개최도시는 이번 성과를 더욱 빛나게 했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한류의 뿌리로 불리는 역사문화 도시다. 환영만찬과 환송만찬에서는 경주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졌다. 방아잎과 경주천년한우를 활용한 향토 음식, 신라 금공예와 전통 다기 전시, 경북을 대표하는 교동법주와 대몽재 등 전통주 시음은 문화외교의 무대가 되었다. 또한 JYP 박진영을 비롯한 콘텐츠 기업 대표들의 참여, 정구호 총감독이 연출한 공연,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과 다국적 합창단의 무대는 한국 문화산업의 저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경주라는 공간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며 ‘문화산업’이라는 미래 담론에 무게를 더했다.   이 자리에서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최초의 APEC 문화산업고위급대화가 경주에서 열린 것은 뜻 깊다”며 APEC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다짐했고, 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를 세계적 문화도시로 만드는 오랜 꿈이 이번 APEC으로 절반 이뤄졌다”고 말했다. 지역의 자긍심과 국가적 비전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번 경주 회의를 단순한 외교적 이벤트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문화산업은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소프트파워의 근간이자, 경제를 견인하는 하드파워다. K-콘텐츠의 성공이 입증하듯, 문화는 상품을 팔고 관광을 늘리며, 나아가 국제 질서 속에서 국격을 높이는 힘을 갖는다. APEC 차원에서 문화산업 협력이 본격화된다면, 역내 국가들은 경제 성장과 사회적 통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일회성 행사로 그친다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한다. 한국 정부는 이번 공동 성명을 토대로 디지털 혁신, 인공지능 기술, 창작자 지원, 인재 양성 등 구체적인 후속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APEC 회원국 간 공동 프로젝트, 문화산업 전문 인력 교류, 공동 투자와 같은 실질적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경주에서의 첫걸음이 아시아태평양 문화산업 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주도국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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