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공식 만찬장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라한셀렉트 경주 호텔 대연회장으로 변경되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불과 한 달여를 남기고 발표된 장소 변경은 준비 과정의 허술함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비판을 낳고 있다.애초 APEC준비위원회는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한옥 형태의 신축건물을 지어 만찬장으로 활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신라 금관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비롯한 국보와 보물이 전시된 박물관을 배경으로 세계 정상들을 맞이해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겠다는 취지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8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연면적 2000㎡ 규모의 건물을 신축했고, 현재 공정률은 95%를 넘었다.
그러나 지난 19일 준비위 제9차 회의에서 만찬장 변경이 전격 결정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이 확정되면서 글로벌 CEO 서밋 참여 인원도 급증했고, 이에 따라 만찬 초청 인원이 220여 명에서 4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수용 규모가 절반에 불과한 박물관 신축 만찬장은 대응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시설의 한계도 변경 배경으로 작용했다. 신축 만찬장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이나 조리시설이 없다. 음식을 외부에서 조리해 운반해야 하고, 화장실도 30~40m 떨어진 박물관 건물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정부 합동안전점검에서도 이 문제가 지적됐으며, 전기·소방 안전성 확보 여부도 불확실했다.
이에 반해 라한셀렉트 경주 호텔은 500석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연회장을 갖추고 있으며, 조리시설·화장실·보안 시스템 등 국제행사에 필요한 편의와 안전 요건을 모두 충족한다. 또한 정상회의장인 경주화백컨벤션센터와 불과 1.8km 떨어져 있어 이동 동선이 짧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문제는 경주의 상징성이 희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공식 만찬장은 APEC 정상회의의 ‘꽃’으로 불릴 만큼 개최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무대다. 2004년 부산 누리마루 만찬장은 지금도 국제적 명소로 남아 있다. 당초 국립경주박물관을 만찬장으로 정한 것도 신라 유산을 배경으로 한 기념사진이 전 세계에 송출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번 변경으로 이러한 ‘경주다움’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기회가 날아가게 됐다. 경주시민들은 “안전과 규모 문제를 고려한 불가피한 결정임은 이해한다”면서도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는 무대에서 경주의 정체성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따라 정부와 준비위는 만찬 무대 배경에 첨성대·불국사 다보탑·황룡사 9층목탑 등 신라 유산을 디지털 미디어 아트로 구현하거나, 경주 특산물을 활용한 만찬 코스, 전통 공연, 포토월 설치 등을 통해 ‘경주다움’을 녹여내겠다고 밝혔다. 신축된 박물관 만찬장은 기업인 네트워킹 공간과 퓨처테크포럼 등 경제행사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김상철 APEC 준비지원단장은 “역대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를 맞아 주어진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며 “행사 전 과정에서 한국과 경주의 매력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행사 직전 만찬장을 변경하는 상황 자체가 졸속행정의 전형이라는 점과 이번 결정이 APEC 성공 개최 이후 경주 브랜드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남길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