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공식 만찬장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라한셀렉트 경주 호텔로 전격 변경되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불과 한 달여를 남기고 발표된 이번 조치는 안전과 수용 능력 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준비 과정의 허술함과 졸속 행정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애초 준비위원회는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전통 한옥 양식의 신축 건물을 지어 만찬장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정상들이 신라 금관과 성덕대왕신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이를 통해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린다는 구상이었다. 정부는 80억 원이라는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 연면적 2000㎡ 규모의 건물을 짓고 공정률 95%까지 마무리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만찬장 변경 결정으로 이 계획은 사실상 무산됐다.
표면적 이유는 늘어난 인원과 시설 부족이다. 미국 대통령과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 확정으로 글로벌 CEO 서밋 참여자까지 포함한 만찬 초청 인원이 애초 220여 명에서 400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국제 정상회의에서 초청 인원이 늘어날 가능성은 상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 능력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 공간을 만찬장으로 계획한 것 자체가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시설 문제도 심각했다. 신축 만찬장은 내부에 화장실과 조리시설조차 갖추지 못했다. 음식을 외부에서 운반해야 하고, 화장실은 수십 미터 떨어진 박물관 건물을 이용해야 했다. 전기와 소방 안전 문제도 미비하다는 지적이 정부 합동안전점검에서 이미 나온 바 있다. 결국 만찬장의 기본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 정상들을 맞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셈이다. 졸속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상징성이다. 공식 만찬장은 APEC 정상회의의 ‘꽃’으로 불린다. 개최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무대이자, 세계 언론이 집중 조명하는 장면이다. 2005년 부산 누리마루 만찬장이 지금도 국제적 명소로 남아 있는 이유다.
경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립경주박물관 만찬장은 신라 천년의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경주의 정체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무대였다. 그러나 호텔 만찬장으로 변경되면서 ‘경주다움’을 직접 드러낼 기회는 사라졌다. 시민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유다. 경주의 상징성을 살리지 못한 채 ‘어디서나 열 수 있는 호텔 만찬’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번 결정이 가져올 파장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경주의 정체성을 살려내는 일이다. 정부와 준비위는 디지털 미디어 아트를 통해 첨성대·불국사 다보탑·황룡사 9층목탑 등 신라 유산을 무대 배경으로 구현하고, 경주 특산물을 활용한 만찬 코스와 전통 공연, 포토월 설치 등을 통해 ‘경주다움’을 녹여내겠다고 밝혔다. 신축된 박물관 건물도 기업인 네트워킹 공간과 경제행사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뒤늦은 보완책이라도 충실히 이행해 실효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는 국제행사 준비 과정에서 ‘예측 가능성과 전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만찬장의 상징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고려하지 못한 계획은 애초부터 결함을 안고 있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무대에서 졸속 행정으로 빚어진 시행착오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 없다. 경주의 도시 브랜드와 국가 이미지를 함께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만찬장 변경은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릴 절호의 기회를 잃게 한 뼈아픈 사례다. 그러나 교훈은 분명하다. 국제행사 유치를 단순한 치적 사업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지역 정체성의 진정한 구현’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시행착오를 값비싼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의 모든 일정에서 경주의 매력과 대한민국의 품격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