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이 경주시내에 내걸었던 홍보 현수막으로 시민을 모욕했다는 거센 비판 속에 결국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국무총리의 직접 지적이 있은 뒤에야 뒤늦게 이루어진 사과는 ‘등 떠밀린 사과’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공기업의 소통 방식과 책임 의식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5일 월성원자력본부가 경주시내 12곳에 내건 현수막이었다. “5년 동안 월성원자력본부가 지방세 2190억을 냈다지요?”, “이번 벚꽃마라톤 때 무료로 주는 국수도 맛있게 먹었잖아!”라는 문구는 시민을 ‘시혜를 받은 존재’로 묘사했다. 곧장 “시민을 거지 취급한 것이냐”는 격앙된 반응이 나왔고, SNS와 언론을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월성본부는 논란이 불거진 지 두 시간 만에 현수막을
모두 철거했지만 이미 불씨는 번졌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한수원은 지역 정당과 시청에 비공식 해명만 했을 뿐 공개 사과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민석 국무총리가 “공직자의 소통 태도를 바로잡겠다”며 공개 지적에 나서자, 한수원은 다음 날인 22일에서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사과했다. 이는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라 외부 압박에 떠밀려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는 인상을 남겼다. 사과의 진정성에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책임 소재를 두고도 논란은 계속된다. 전대욱 한수원 사장 직무대행과 정원호 월성본부장은 “실무 담당자가 독단적으로 실행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십억 원을 쓰는 대형 홍보사업도 아닌, 단순 현수막 설치라 하더라도 공기업의 조직 특성상 상부 보고와 검토 없이 진행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모든 책임을 일선 직원에게 떠넘기려는 ‘꼬리 자르기’로 비칠 수 있다.
환경단체들은 더 나아가 이번 사태가 단순한 실무자의 실수가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깔린 행동이라고 본다. 정부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원전 지원금 축소에 대한 불만을 지역 여론으로 포장하려 했다는 지적이다. 현수막 속 “국수”와 “세금” 문구가 단순 홍보를 넘어 “원전 지원이 줄면 시민이 피해를 본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한수원이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해도, 이미 시민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총리실 감찰과 한수원 자체 감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하지만 징계 몇 명으로 이 사건이 끝날 사안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한수원 내부에 자리 잡은 시혜적 사고방식과 소통 부재를 고쳐야 한다. 공기업은 지역과 상생해야 할 파트너이지, 베풀고 시혜를 베푸는 주체가 아니다. ‘무료 국수’라는 표현이 모욕으로 읽힌 배경에는 시민을 대등한 동반자가 아닌 대상화된 존재로 보는 조직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공기업 책임성과 민주적 소통의 문제를 드러낸 중대한 사건이다. 한수원이 진정으로 신뢰를 회복하려면 단순히 사과와 징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재발 방지를 위한 내부 검증 시스템을 정비하고, 지역 사회와의 소통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역 주민을 존중하는 태도, 시민을 파트너로 대하는 문화를 확립해야 한다.
총리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 사과조차 하지 않은 늑장 대응은 이미 시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료 국수”라는 몇 글자가 보여준 교훈은 분명하다. 공기업의 모든 언행은 곧 국가와 지역을 대표하는 메시지다. 이번 사건이 한수원의 뼈아픈 반성과 근본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불신과 갈등의 불씨는 언제든 다시 피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