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 무렵 경주 도심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임대’ 안내문이 붙은 빈 점포들이 유독 눈에 띈다. 고물가와 고금리, 여기에 온라인 쇼핑의 공세까지 겹치며 지역의 모세혈관인 동네 상점들이 하나둘 불을 끄고 있다. 황리단길 등 일부 관광 상권의 화려한 이면에는 성건동, 황성동, 용강동 등 시민들의 삶터와 맞닿은 골목상권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자리 잡고 있다.소상공인들의 한숨이 깊어가는 지금, 정부는 내년부터 온누리상품권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겠다고 발표했다. 구매할인을 낮추는 대신 전통시장은 10%, 지방 골목상권(골목형상점가)은 8%까지 사후 환급 혜택을 주고, 지역 관광·숙박 혜택까지 연계해 지방 소비를 살리겠다는 구상이다. 국비가 투입되는 온누리상품권의 온기를 전통시장 담장 너머 동네 골목길까지 퍼뜨리겠다는 정책적 전환이다.문제는 이러한 정부의 단비도 지자체가 ‘골목형상점가’라는 그릇을 만들어 놓아야만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전국 지자체들이 앞다퉈 조례를 개정해 골목형상점가 지정 문턱을 낮추고 국비 공모 사업과 온누리상품권 가맹 혜택을 쓸어 담는 동안, 경주시의 시계는 사실상 멈춰 서 있었다.경주시는 지난 2015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조례」를 손질한 이후, 변화하는 유통 환경 속에서 골목상권을 제도권으로 안아줄 후속 입법에 극도로 소극적이었다. 더욱이 경주시는 지난 2022년 8월 ‘경주시 지역상권 상생 및 활성화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까지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실제 제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행정 스스로 내걸었던 소상공인 살리기 약속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거둬들인 셈이다.지역 상인들은 이 석연치 않은 행정 후퇴의 배경에 ‘전통시장 기득권 눈치 보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경주시 관내에 등록된 전통시장은 19개소에 달한다. 조직화된 상인회와 막강한 여론 영향력을 가진 이들에게 골목형상점가 확대는 달갑지 않은 소식일 수 있다. 온누리상품권 사용처가 동네 골목으로 넓어지면 손님이 분산되고, 한정된 시의 지원 예산이라는 ‘파이’를 나눠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최근 경남 김해시가 전통시장 측과 소상공인 간의 팽팽한 입장 차로 골목형상점가 지정에 극심한 진통을 겪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행정이 표심과 직결된 목소리 큰 단체의 눈치를 보느라 영세 골목 소상공인들의 밥줄을 외면했다면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직무유기다. 그간 전통시장에는 아케이드 설치, 주차장 조성, 현대화 사업 등 해마다 수십억 원의 혈세가 쏟아부어졌다. 반면 전통시장 구역에서 불과 몇 걸음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식당과 점포들은 온누리상품권 가맹조차 하지 못한 채 역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전통시장 상인만 경주시민이고, 골목길 자영업자는 경주시민이 아니란 말인가.더욱 뼈아픈 대목은 영세 상인들의 권익을 최일선에서 대변해야 할 경주시소상공인연합회의 무대응이다. 타 지역의 소상공인연합회가 지자체와 의회를 상대로 조례 개정과 지원 확대를 강력히 촉구하며 투쟁하는 것과 달리, 경주에서는 2022년 조례안이 증발할 때도, 골목형상점가 지정이 타 지자체에 비해 한참 뒤처질 때도 이렇다 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표 단체의 기이한 침묵 속에 애꿎은 밑바닥 상인들만 속을 태우고 있다.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온누리상품권과 지역 관광 혜택의 연계’는 천년고도 경주에 다시없는 기회다. 관광객들이 전통시장에서 지갑을 열고, 그 발길이 인근 골목형상점가의 개성 있는 식당과 카페, 숙박시설로 이어지게 만든다면 지역 경제 전체의 파이는 지금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경주시는 이제라도 전통시장 상인회의 눈치를 살피는 보신주의 행정에서 벗어나, 지역 실정에 맞는 과감한 골목형상점가 육성 조례를 즉각 마련해야 한다. 소상공인연합회 역시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상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할 때다. 골목이 살아야 경주 경제가 산다. 행정의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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