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가 성숙해질수록 자치단체의 정책은 구호가 아닌 숫자로, 전시(展示)가 아닌 실효로 증명되어야 한다. 시민들이 땀 흘려 낸 세금은 단 1원이라도 지역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고 골목상권을 살리는 마중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드러난 경주시의 스마트 관광 플랫폼 ‘경주로ON’의 실태는 이러한 기본 원칙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 4년여간 투입된 혈세가 무려 100억 원에 달하지만, 지난 3년간 관내 등록 가맹점에서 발생한 누적 결제액이 고작 21만 5,000원에 그쳤다는 충격적인 수치는 실소를 넘어 깊은 분노를 자아낸다.사업 초기 경주시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정부 공모 사업에 선정되어 국·도·시비 70억 원을 들여 개발하고,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 빅데이터를 결합해 KTX 예매부터 숙박, 식당 예약까지 한 손으로 해결하는 혁신적 관광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소상공인의 판로를 열어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포부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손에 쥔 성적표는 참담하다. 초기 개발비 70억 원에 더해 서비스 고도화 명목으로 20억 원을 추가로 쏟아부었고, 매년 5억 원에 달하는 운영비가 꼬박꼬박 지출됐다. 그럼에도 이용자가 마주하는 것은 잦은 로그인 오류와 먹통 현상, 민간 포털의 외부 링크를 단순 연결해 놓은 조잡한 화면뿐이다. 수십억 원을 들였다는 핵심 기능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민간의 배달·예약 플랫폼이 고도화된 IT 환경 속에서, 이처럼 기초적인 기능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관제 깡통 앱’을 100억 원이나 들여 만든 이유를 도대체 어떤 시민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근본 원인은 기획 단계의 안일함과 운영 주체의 전문성 결여에 있다. 민간 시장이 이미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영역에 관이 직접 뛰어들겠다고 나선 발상 자체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었다. 게다가 경주시는 플랫폼 관리와 운영을 설립 취지와 성격이 판이한 ‘경주스마트미디어센터’에 위탁했다. 모바일 플랫폼은 출시 이후의 정교한 데이터 분석, 쉼 없는 유지보수, 그리고 현장 소상공인과의 긴밀한 네트워크 구축이 생명이다. 본업이 따로 있는 비전문 기관에 매년 5억 원의 예산을 쥐여주며 관리를 떠넘겼으니, 사후관리가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다. 실제로 상인들은 가입 당시 한 번 얼굴을 비춘 이후 수년간 단 한 차례의 관리나 연락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현장과의 괴리가 만들어낸 필연적 참사다.그럼에도 경주시는 문제를 직시하기는커녕 ‘다운로드 10만 돌파’니 ‘경품 이벤트’니 하는 허망한 숫자로 본질을 가리는 데 급급했다. 설치만 해두고 삭제하거나 쓰지 않는 허수(虛數) 지표로 치적을 포장하는 사이, 시민의 피 같은 세금은 허공으로 증발했다. 실질적인 거래가 전무한 플랫폼에 가입자 수가 수십만 명인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이제 결단의 시간이다. 오는 10월 열리는 경주시의회 행정사무감사는 이번 사태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는 엄중한 심판대가 되어야 한다. 시의회는 1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설계부터 개발, 유지보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느 항목에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영수증 한 장까지 현미경 검증해야 한다. 부실한 기획을 통과시키고 방만한 위탁 운영을 방치한 행정의 책임자, 역량이 미달함에도 위탁을 맡아 관리를 팽개친 운영 기관 모두에게 명백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온정주의나 면피성 질책으로 얼버무릴 일이 결코 아니다.아울러 행정사무감사는 단순한 질타를 넘어 과감한 출구전략을 마련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실패한 정책을 붙잡고 ‘고도화’나 ‘활성화’라는 미명 아래 혈세를 계속 쏟아붓는 것은 시민에 대한 배임이다. 이미 시장성을 잃고 기능조차 미달하는 ‘경주로ON’은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과감히 폐기하는 것이 옳다.지금 필요한 것은 관이 만든 어설픈 독점 플랫폼이 아니다. 네이버, 카카오, 야놀자 등 이미 수천만 명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민간 플랫폼의 오픈 API와 공공 빅데이터를 영리하게 연계하는 새로운 디지털 관광 전략으로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해야 한다. 관은 인프라와 양질의 공공 데이터를 개방하고, 지역 소상공인들이 민간 플랫폼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간접적 촉매자 역할로 물러서야 한다.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실패를 알면서도 혈세를 낭비하며 고집을 부리는 오만과 무책임이다. 경주시와 시의회는 이번 행감에서 100억 원 혈세 낭비의 전모를 시민 앞에 명명백백히 밝히고, 뼈를 깎는 반성 위에 경주 관광 행정의 미래를 다시 세워야 한다. 25만 경주시민의 눈과 귀가 10월 시의회 감사장으로 쏠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