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기획 : 2000만 관광시대 발전원동력은 무엇인가? ②경주 관광의 미래, 여행의 속도를 늦추는 게 답이다.
제주도를 여행하다보면 게스트하우스 를 자주 이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여행객들을 종종 마주친 다. 이른바 제주도가 좋아서 몇 달째 눌러앉아 게스트하우스에서 장기투숙 하고 있는 제주도 매니아들이다. 이들 이 투숙하는 게스트하우스에는 주인장 과 여행자들을 구별해내기가 힘들다. 여행객들이 손님이 오면 맞이하고 안 내하고 주변 청소도 하면서 주인장 행세를 한다. 궁금해서 물어보면 한두 달째 장기 투숙하며 제주 여행을 즐기 고 있는 여행객들이 태반이다. 이들은 이미 여행객이라기 보다는 거의 반쯤 현지의 주민이 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문화에 동화되어 있다. 제주 여행의 문화를 이렇게 변화 시키는 데는 올레길 코스의 개발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표적 관광도 시라 자부하는 경주의 여행패턴은 제주도에 비하면 속도가 너무 빠르다. 세월호 사고 이전 경주의 대표 관광 상품이었던 수학여행만 봐도 2박3일이라는 짧은 일정에 수십 개의 역사 유적과 관광지가 코스에 잡혀있고, 여행 가이드를 따라 바쁘게 움직여 기념사진 몇 장 남기면 다음코스로 이동해야 하는 빡빡한 행군이다. 이런 여행에서는 경주의 지역민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문화를 즐기는 지 전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객의 소비가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구조가 형성되어 버렸다. 실제 2천만 관광객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경주지만 그들의 소비는 대부분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리조트와 호텔이 집중되어 있는 보문단지와 불국사로 대표되는 역사 유적지에 집중되어 있 을 뿐, 정작 지역에서 터전을 잡고 식당 을 운영하거나 전통시장에서 장사하 시는 지역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패 러다임으로 굴러가고 있다. 화백컨벤 션센터 개관과 국제회의 도시 지정으 로 MICE 산업 성장의 성과를 대대적 으로 선전하고 있는 경주이지만 지역 주민들이 체감하고 있는 MICE 산업의 성장 효과는 극히 미미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경주를 찾는 관광 객의 여행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 다. 회의나 컨벤션 행사에 참여하기 위 해 경주를 찾는 손님들은 경주의 대표 유적을 둘러볼 시간도 부족하다. 그들 에게 경주의 도심이나 전통시장 지역 민이 운영하는 토박이 음식점을 찾아 다니며 여행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그러기에는 딱히 매력적인 콘텐츠나 볼거리도 없다. 경주에 오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불국사,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둘러 보기,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좀 있다면 동궁과 월지 야경 투어나 남산 등반 정도이다. 수학여행으로 오거나, 컨벤 션 행사로 오거나, 배낭여행을 오거나 경주의 여행 코스는 거의 동일하다. 그렇게 경주의 여행은 단순하고 속도 가 너무 빠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대표적 신라 유적지를 돌아보며 기념 사진을 남기는 동안 여행객과 지역주 민이 만나는 접점을 찾아내기는 힘든 구조이다. 그러니 관광객이 쓰는 돈이 지역주민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대기업 이 운영하는 호텔, 리조트, 여행사의 수익으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주에서 지역민이 운영하는 펜션이나 게스트하우스 등 여행객을 위한 객실을 가장 많이 판매 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대기업이 운영하는 오픈마켓(온라인사이트)이다.
경주는 누가 뭐라 해도 신라 천년의 고도이다. 그리고 경주 관광의 키워드 역시 신라역사와 떼어 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경주 여행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경주의 관광 정책이 신라왕경 복원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에 집중하는 동안 경주 여행 의 콘텐츠는 ‘신라’라는 스스로 만 든 틀 안에서 또 고립될 위험이 있다. 부여의 백제역사 재현단지의 실패를 돌아봐야 한다. 관광객의 취향이 이제 단순히 역사 유적을 재현해 놓은 이미 테이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정도 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제주도의 여행 객처럼 한 달이건 두 달이건 경주에 머무르면서 경주의 구석구석을 걷고 지역주민의 삶과 소통하며 지역민이 자주 가는 토박이 음식점을 찾아다니 고, 지역의 로컬푸드가 유통되는 전통 시장에서 쇼핑을 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래된 골목길 구석구석을 보 존하고 스토리를 입혀 매력적인 관광자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경주 에 가면 ‘신라’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경주 사람들의 향 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볼거리와 살거 리 등 다양한 관광 콘텐츠를 적극적 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관광객의 소비 가 고스란히 지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밑거름이 되는 여행, 그것이 바로 공정여행(Fair Travel), 즉 착한여행이다. 경주의 관광정책은 이제 착한여행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