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58년 개띠, 질곡의 세월 온몸으로 헤쳐 오다!삼천리강산의 정기(精氣)와 부모님의 노력으로 1958년 무술(戊戌)년에 태어나보니 연초부터 이미 정치판 돌아가는 게 심상찮았다. 이승만 정권이 강력한 라이벌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국가변란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해 버렸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었다. 험난한 인생역정을 예고하는 징조가 아닐까 좀 불안했다.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고 했는데 제 때에 태어났는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최초로 90만명 넘는 <베이비붐 세대>의 상징그런데 태어나보니 동기들이 너무 많았다. 무려 92만 17명. 역사상 처음으로 90만명을 넘었단다. 이 많은 동기들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설상가상 동시대에서 경쟁해야 할 동생들은 더 많이 태어났다. 59년 돼지띠는 97만 9천 267명, 60년생 쥐띠는 무려 100만 6천 18명이나 줄줄이 뒤를 따랐다. 동생들이 치고 올라 올 거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사람들은 우리 세대를 <베이비붐 세대>라고 불러 주었다. 동생들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엄마 뱃속에서 한 살을 먹었으니 우리 나이로 2살 때였다. 언감생심 돌잔치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9월 17일 추석날 새벽, 사라호 태풍이 경상도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월성군에서만 79명이 사망했다. 초속 40km의 강풍과 홍수에 이제 갓 돌이 된 아이를 놓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부둥켜안은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모님께 감사할 일이다.사라호태풍·보릿고개를 넘고 살아남다사라호 태풍에서 겨우 살아남아 3살이 되니 4.19일,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거인지 혁명인지 야단법석을 떨더니 5살 되던 해 5월 16일에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또 혁명인지 구데타인지 또 난리를 쳤다. 인생 조용히 살기는 틀렸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1965년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 학급에 6-70명 쯤 되었다. 많은 데는 80명도 넘었다. 신문에서는 <콩나물시루 교실>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많고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공부했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월남인가 어디에 베트콩 잡으러 간다고 했다. 청룡부대, 맹호부대가 특히 유명했다. 삼촌들이 귀한 달러를 보내주기도 했다.나일론 옷 속으로 매써운 칼바람이 쏭쏭 들어왔지만 그래도 설매 외에는 달리 놀 거리가 없어 동네 앞 저수지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이른바 <보릿고개>였다. 다행히 학교에서는 강냉이 죽과 빵을 주었다. 어떤 친구는 집에 있는 동생에게 주려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갸륵한 친구였다. 운동장에 일렬로 쭉 세워놓고 분유인지 우유인지 한 바가지씩 나눠 주었다. 그 무서운 <보릿고개>에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미국에서 원조한 거였다. 이만큼 키가 큰 것도 그 당시 먹은 우유 덕분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악수를 나누는 그림이 있는 밀가루 포대가 아직도 기억에 가물가물 남아있다. 뺑뺑이 1세대···교육정책의 시험대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뺑뺑이>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다람쥐 쳇바퀴 비슷했던가 물레하고 비슷했던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느 중학교 강당에서 오른 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두 번 돌리니 번호가 새겨진 은행 알이 튀어 나왔다. 그렇게 배정된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류 학교에서는 뺑뺑이로 들어온 후배들을 인정하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섭섭하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누가 뺑뺑이 돌리고 싶어 돌렸나? 그래서인가. 58 개띠들은 권위에 도전하고 평등의식이 강하다고 학자들이 분석한다. 그렇게 우리 58 개띠들은 <뺑뺑이 1세대>가 되었다. 왜 뺑뺑이를 돌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듣기로는 역시 우리 동기인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군이 공부를 잘 못하여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가 정책에 따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말다가 하는 바람에 우리는 지금도 한자에 약한 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북괴가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린다고 하여 교련을 배웠다. 요즘은 초등학생 때 사춘기가 온다지만 우리 세대들에게는 대체로 중학교 2학년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춘기를 겪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 한 두 가지는 누구나 갖고 있다. 용기가 없어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못했던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펜팔도 부지런히 했다. 참, DJ가 있는 음악다방에도 열심히 갔었지....갈등과 번민의 청년기···격동의 시대를 맞다1977-8년을 전후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도약하는 시기였다. 대기업에서는 공무원 봉급의 두 배 이상을 주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하니 대학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최루탄이 교정에 나딩굴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되어 성인이 되었는데도 대통령을 뽑는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10.26 사건에 이어 80년 5월 18일에는 전라도 광주에서 폭도들이 나라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KBS와 조선일보 등에서 연일 대서특필하더니 이어 전두환이라는 장군이 등장하고, <서울의 봄>이 오는가 싶더니 또다시 <신군부>라는 군인들이 12.12 사태를 통해 권력을 찬탈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자기들끼리 나라를 쥐락펴락했다. 기성 정치인들이 모조리 잡혀가는 모습도 보았다. 대부분 58 개띠들은 본의 아니게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종잡을 수 없는 혼미한 정국에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부조리에 분노한 동기들은 진보의 길을 가게 됐고,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냐며 기다려보자는 동기들은 보수의 길을 가게 됐다. 고향의 부모님에게는 절대로 데모에 참가하지 말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아야 했다. 격동의 세월이자 격랑의 상황 속에서도 많은 동기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취직을 한 것이다. 다행히 취직은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러더니 또 어느 핸가는 고뇌에 찬 결단이라며 4.13 호헌조치라는 것을 발표를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1987년에는 6.29 선언이 나왔다. 6.10 민주항쟁 때 일부 동기들은 이때 <넥타이 부대> 멤버로 참여했다. 이렇게 우리는 본의 아니게 10.26부터 6.29까지 수많은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체험한 산증인이 되었다.30대, 인생의 전성기...그럭저럭 잘 살았지만어쨌거나 나라는 안정되었다.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다. 열심히 일을 했다. 1990년대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대출을 떠안고 아파트도 장만했다. 물론 고향의 부모님이 보태준 목돈이 큰 보탬이 되었다. 88년 치러진 올림픽 이후 민주화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도 태어났다. ‘둘만 나아 잘 기르자’고 벽마다 포스터가 붙여져 있기에 그래야 되는 줄 알고 대부분 2명을 낳았다. 좀 있으니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야단하기에 하나만 낳은 친구도 많았다. 요즘은 아이들이 모자란다고 3명 이상을 낳으면 각종 혜택과 함께 돈도 준단다. 그래도 아이를 잘 낳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여성들은 ‘내 자궁을 왜 국가에서 간섭하느냐’고 반발한다. 격세지감이다. 3당 합당인가를 통해 <문민정부>가 탄생하는 것도 보았고, 진보적 대통령이 탄생하여 <국민의 정부>라고 호칭되는 것도 보았다. 40대 초반에는 <참여정부> 탄생도 보았다. 우리 개띠들은 8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인생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른다. ‘일한 만큼 떠나라’ 하기에 해외여행도 두세 번 다녀왔다. 신문에서는 <성 개방 시대>가 되었다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낮 설었다. 일부 발 빠른 동기들은 시대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능력이 부족한 친구들은 노래방 <삐삐발이>로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인생은 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순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금도 좀 있고 적금도 좀 있으니 여유로운 노후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 풍파 다 겪으면서 어렵사리 키운 자식들이 용돈도 좀 줄 거라는 기대감도 버리지 않았다. IMF 직격탄···악전고투 끝에 살아남다그런데 1997년 말이던가 불혹(不惑)의 나이, 이제 막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 즈음 40에 기절초풍할 대형 사건이 터졌다. IMF였다. 2살 때 겪은 사라호 태풍보다 더 강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 은행이 있는 줄은 나중에 신문에서 보고야 알았다. 뭔가 조짐이 심상찮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만한 사간으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기업이 도산하고 이자율이 급등하고 가정이 파탄 났다. 자살률과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졌다. 거리에는 전에 없던 노숙자가 신문지를 덮어쓰고 쭈그리고 있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명예퇴직 등 전에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 연일 신문지상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꼭 필요한 보험만 남겨놓고 해약을 해야 했다. 적금을 깨서 대출이자를 감당해야 했다. TV에서는 돌반지를 모아서 IMF를 극복한다고 온 국민이 줄줄이 나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부자들이 갖고 있는 금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도 목격했다. 부자들은 그 와중에서도 고율의 이자를 받으면서 부(富)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2007년에는 ‘리먼브라더스 모기지’라는 이름도 생소한 사태도 터졌다. 어느 해는 또 그리스발 금융위기도 있었다. 그리스에는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왜 그리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봐야하는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하, 그래서 <글로벌 시대>라고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다.어언 환갑, 이순을 맞이한 낀 세대IMF를 극복한지 어언 20년, 2018년이 됐다. 이순(耳順)을 맞이했다. 아등바등 열심히 일을 했다. 빚도 어느 정도 갚았다. 굴곡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부닥쳐 온 우리들이다. 그 동안 동고동락한 아내는 이제 갱년기를 맞았다. 세월은 피해갈 수 없는 줄 알았지만 덧없음은 어찌할까? 우리는 그럭저럭 취직을 했지만 우리가 낳은 아이들이 지금 취직을 해야 한다. 당연히 인구수가 많은 우리 세대가 낳은 아이들 역시 많다. 우리 세대가 낳은 아이들이 현재의 청년세대다. 지금은 겨우 한해 43만명이 태어나지만 우리 아이들 세대는 60만명이 넘는다. 보통 아이 둘을 낳았기 때문이다. 취직의 문이 그만큼 좁아졌다는 뜻이다. 컴퓨터와 자동화 등으로 일자리는 줄었는데 취직을 해야 할 청년들이 많으니 취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란다. 와중에 자식들 결혼도 시켜야 한다. 우리 세대가 결혼할 때는 셋방에서부터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세월이 어떻게 변했는지 아들 가진 집은 아파트를 사주거나 최소한 전세라도 마련해 주어야 하는 부담도 우리 58 개띠들이 떠안고 있는 무거운 짐이다. 천신만고 끝에 IMF를 건너왔더니 또 허리가 휜다. 노년이 두렵다. 우리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당연한 효도로 알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부모를 모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사회학자들은 우리 세대를 부모봉양과 자식효도의 중간에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끼어있다고 하여 <낀 세대>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 58 개띠들은 환갑이다. 30년전 하계올림픽을 보고 또 30년만에 동계올림픽을 맞이하게 된다. 올림픽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지 하계·동계 올림픽 둘 다 우리나라에서 보게 되는 어쩌면 행운의 세대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경제가 그나마 숨통을 폈던 것처럼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경제가 좀 풀렸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후에는 우리나라 노령인구가 급등할 것이다. 우리 베이비붐 세대가 70세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에서는 노인복지 대책에 부심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내는 세금으로 왜 노인을 부양해야 되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것이다. 고얀 놈들, 누구 때문에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산업을 일으키고 민주화는 누가 했는데....섭섭하지만 그러나 참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을 것이다.이제 중늙은이 신세···어느덧 <꼰대>가 되다이제 하얀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중늙은이가 됐다. 노후라는 미래가 두려워 막걸리 값 내는 데에도 망설여진다. 길거리에서 스치는 아가씨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아쉬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아저씨라고 부르더니만 이제 서슴없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은행창구 아가씨에게 뭐라 항의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됐다. 어느덧 <꼰대>가 된 것이다. 술자리에서 만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줄곧 옛날 얘기뿐이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미래 이야기는 화제 거리 밖이다. 경조사 메모가 휴대폰을 울릴 때마다 이 친구가 내 경조사 때 부조를 했던가 안했던가를 따져봐야 한다. 부조금을 받았다면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안 받았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주저앉는 신세가 되었다. 이래저래 서글픈 일이 한둘이 아니다. 마음은 청춘이건만 몸은 점점 노쇠해 가고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고...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100세까지 가려니 마음이 착잡하다. 58 개띠, 환갑을 맞이한 중늙은이들의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거기다가 짐은 무겁다.사라호 태풍에도 살아남은 생존본능에 이어 산업역군을 거치면서 독재의 서슬에도 살아남았다. 민주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우리 58 개띠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지금도 어떤 자리에서든 58 개띠를 만나면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 보릿고개에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되기까지 60년 세월 돌아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삭풍이 부는 광야에서도, 거친 파도에서도 살아남은 우리들이 아니던가. 그래도 전쟁이라는 참화를 피해가는 행운을 누렸다. 자식들이 걱정이다. 제발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58 개띠들이여, 만세, 만만세....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고 했던가. 말 그대로 인내와 끈기로 세상과 부딪히며 좌충우돌 살았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아닌가.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다.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 58 개띠들이여 단결하라! 58 개띠들이여 영원하라! 58 개띠들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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