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공자(孔子)와 인간미(人間美)공자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나이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진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서 자란 공자는 열 아홉에 결혼을 했지만 성미가 까다로운 공자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집을 나가 버렸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나이 예순 여덟에 아들이 죽었고, 2년 후에는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죽었다. 그는 평소에 안연을 계승자로 지목하고 있었기에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라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었다고 한다.이어 다음 해에는 재아가 제나라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 다음 해에는 그를 가장 믿고 따르던 자로마저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시체가 항아리에 젓갈로 담겨져 공자에게 보내졌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하늘은 내개 빨리 죽기를 바라는구나’라며 마치 양팔이 잘려나간 듯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고 한다. 얼마 후 봄이 올 때쯤이었다. 여느 날처럼 자공은 아침 일찍이 공자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공자는 지팡이를 쥔 채 문 앞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탄식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도 무너지는구나. 철인(哲人)마저 시들어버리는구나!”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공이 급히 부축하여 방에 눕혔으나 공자는 의식을 잃고 7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자의 나이 일흔 셋이었다.공자는 죽은 후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그 명예는 2천 5백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그의 사원은 곳곳에 건립되었고 12세기 초에는 신(神)으로까지 추대되었다. 공자는 단순한 인간이기를 원했고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도 후에 성인으로 추대 받고 있다.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결코 완벽한 인간이나 성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제자의 항의에 쩔쩔매는 스승이었고, 낮잠을 자는 제자에게는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인간’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는 자신이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어기고 통곡을 하기도 했다. 3년상을 1년상으로 줄이자는 제자의 제안에 대해 ‘자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라고 말하고는 제자가 나가자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음식은 매우 까다로웠고 술은 양을 따지지 않고 마셨다. 그러나 취해서 흐트려지지는 않았고 정신이 혼미해지지도 않았다. 옷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관리를 할 때는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다중성격도 있었다. 식사나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고수레를 했다. 주위에 있는 귀신도 먹으라는 뜻이다. 공자는 일하지 않는 인간,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싫어했다. “내가 하루종일 생각해봤지만 얻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정 할 일이 없거든 멍청하게 잡담이나 하지 말고 장기나 바둑이라도 두어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계로라는 제자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우리가 인간을 섬기는 일도 다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未能事人 焉能事鬼)”라고 되묻는다. 이어 죽음에 대해서 묻자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한다. 공자는 인간이기를 원했고 실제로 철저하게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다음 경주시장이 되고자 여러 사람들이 시민들을 만나고 다닌다. 도·시의원이 되고자 움직이는 사람도 많다. 선량이 되고자 하는 삶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간미’를 갖춘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권력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인간적인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야 따뜻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이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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