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니카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온 김성희 단원을 만나다 “봉사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 내가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행복”지난 2016년 8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한국 국제봉사단 코니카 단원으로 스리랑카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온 김성희(전 경주시새마을문고불국동지회 회장)씨를 2월 6일 오후2시에 ‘커피볶는집 마노’에서 만났다. 한국국제봉사단 코니카 새마을 재단 팀원으로(일반 단원은 각 나라에 1명씩, 2년) 14개월 동안 스리랑카에 파견되었는데, 각 나라로 떠나기 전에 서울 양재동 교육관에서 1개월 동안 업무 및 언어 교육 합숙 훈련을 받았다. 김성희씨가 스리랑카에 가게 된 동기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리랑카에 쓰나미가 와 15일 동안 집짓기 봉사활동을 참가했는데, 스리랑카인들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 지망을 하여 선택이 되었다. 처음에는 가정여건과 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설득을 하며, 6년 동안 해외봉사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준비하는 모습에 가족들도 동의를 했고, 다른 나라에 가 봉사도 하고 우리나라와는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새마을 대학(구미 경운대학교)에서 실시한 전반적인 사업에 대한 교육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을 수없이 되새기며 해외봉사를 나갔다. 김성희씨는 스리랑카를 가기 전까지 청소년수련관에서 청소년 상담을 10년 넘게 재능기부를 했고, 경주시 새마을문고 불국동분회 회장 역임, 동궁원 식물 해설가, 장애인복지단체 사회적기업()에서 장애우들과 빵을 만들어 판매한 다양한 경력이 있는 준비된 활동가였다. 스리랑카에 도착해 1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가게 된 오지마을 피티예가마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정글 숲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2시간 걸리는 지역이었다.낯선 환경과 이름도 모르는 벌레들, 도마뱀, 원숭이, 가끔씩 나타나는 살모사, 파파야 열매 떨어지는 소리(많은 현지인들이 맞아 사망한다고)에 가슴이 쿵쾅거리고 번개가 치는 날도 잦다고 했다. 컴컴한 화장실 사용은 불안하고 무서워 힘들었으며 도로가 비포장도로라 차량으로 10분거리를 40분 넘게 이동을 했다고 한다. 그녀가 맡은 임무는 주민대상 교육 담당이었다. 첫 시작을 위해 조합을 결성하고 ‘(느타리종)버섯’에 대한 교육을 중심으로 4개조를 나눠 신발공장 의류공장 등 팀별로 공장 운영안을 만들었다. 조합원 모집, 생산, 판매처 확보, 판매, 수익분배 등의 교육을 병행하며 모둠별 토론과 발표를 통해 우수한 팀은 선물을 증정하며 힘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30여명의 부녀회를 조직하여 요리교실과 재봉교실을 격주로 운영하였다. 요리교실에서는 버섯을 이용한 스프, 버섯밥, 장아찌 등의 버섯 요리 실습을 하였고, 우리나라 잡채 특강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한 재봉교실에서는 손쉽고 판매 가능한 생리대, 시장가방, 발매트 등을 만들었는데 바자회를 열고, 지역 장날에 판매를 위해 군청에 신고하고 관련 공무원과 마트 관계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천막 3군데에서 버섯을 홍보하고 요리 시식과 판매을 위해 제품 선별, 품질 검사, 포장까지 꼼꼼히 준비하는 부녀회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하며 “스리랑카 교장 급여가 우리나라 돈으로 32만원에서 40만원, 바나나농장 월급이 2천원쯤 되는데, 한 달에 천원을 벌기가 힘든 현실에서 자기가 만든 물건들이 팔리는 것을 좋아하던 얼굴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재봉교실에서 만든 수제품을 마트에 납품하는 결과물을 얻게 되어 무척 기뻤다고 했다. 지난 사업에서 옷을 만들기 위해 구입했던 재봉틀을 이용해서 경쟁력이 있는 수제품을 만들어 일정 수익금을 마을 발전기금에 기부를 하고, 생리대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여학생들에게 생리대를 만들어 나눠주는 일들은 진정한 봉사활동의 표본이 아닐까 한다. 부녀회 조직과 함께 청년회 조직은 피티예가마 지역의 활기를 불어 넣었다고 본다.거의 대부분 직업이 없는 25명의 청년((18세부터 29세)들을 대상으로 ‘세계 청소년들의 모습, 나의 꿈에 대한 설계, 마을에서 내 역할은 무엇?’의 강의로 꿈에 대한 동기부여와 개인 소감 발표를 3차에 걸쳐 지속적으로 토론했다.나의 역할 중에 마을 쓰레기 수거, 화훼농장, 바나나농장 운영 등을 계획했고 바난 농장을 운영하게 되었고 청년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고, 김성희씨는 주민교육과 회계 업무까지 맡아 너무 바쁜 생활 속에서 어느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회의감도 잠시 교육과 조직 활동들의 사업이 바로바로 효과가 나타나고, 청년들이 꿈을 갖게 되고 일자리를 갖게 된 감동과 하루를 멍하니 보내는 여성들이 재봉교실에서 만나 즐겁게 일하는 모습은 같은 여성으로써 굉장히 보람 있었다고 한다. 지금 김성희씨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한 번 더 해외 봉사를 위해 나아가길 희망한다. 스리랑카에서 부족했던 것을 보완해서 다시 봉사하고 싶다고 하며,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면서 “봉사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 내가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행복하다”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스리랑카 피티예가마에서 김성희씨의 이름은 ‘올루(연꽃)’였다.피티예가마가 진흙투성이의 연못이었다면 김성희씨는 꽃잎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연꽃이었으며, 커다란 잎은 그들에겐 희망이요, 연꽃 씨앗은 부녀회와 청년회가 아니었을까! 서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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