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국가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방폐장을 경주에 유치했고, 경주는 20년 넘게 묵묵히 그 짐을 감당해왔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희생을 기회로 이용한’ 처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시행령에 기존 건식저장시설에 대한 지원 방안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모습은, 이재명 정부의 국정철학인 ‘공정, 상식, 공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경주는 지난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하며 정부와 ‘고준위 폐기물은 외부로 반출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201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에 대한 공식사과와 언급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16년 반출약속 이후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정부는 이 약속을 조용히 덮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을 제정했다.그마저도 주민과의 소통은 부족했고, 뒤이은 시행령에도 기존 저장시설을 수용한 지역에 대한 어떠한 지원 조항도 담기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행정적 배신이며, 지역주민을 상대로 한 ‘정책적 농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더욱이 주민들은 1차 캐니스터, 맥스터가 아무런 공론 절차 없이 설치된 상황에서, 후속 시설에만 지원금과 공청회를 제공한 정부의 태도에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차 맥스터에는 750억원의 지원이 수반됐지만, 이번 시행령에는 불가 방침을 고수 하고 있다.현 정부는 ‘공익 우선’을 강조하며 에너지 전환, 정의로운 전환을 언급해왔다. 하지만 현재 경주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정의도, 공정도 찾아보기 어렵다. 주민들과 약속한 ‘외부 반출’은 말뿐이었고, 이제 와서는 기존 시설의 피해에 대한 보상 없이 새로운 법만 던져놓았다. 이는 정치적 책임 회피이자 행정적 무책임이다.경주의 사례는 단지 한 지역의 민원이 아니다. 이는 국가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 있고 신뢰 있게 운영되는가를 가늠하는 기준이며, 나아가 국민이 정부를 믿을 수 있는가를 판가름하는 시험대다. 고준위특별법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하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되길 원한다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시행령에 기존 저장시설에 대한 실질적 보상과 지원 방안을 명문화해야 한다.공정과 상식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돼야 한다. 지역을 희생시키며 세운 정책 위에 국민의 신뢰는 세워질 수 없다. 경주가 요구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기본적인 약속의 이행’이다. 그 기본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공익이며, 그것이 정부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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