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보문 씨네Q. 경주시정신건강복지센터가 마련한 제3회 생명존중 영화제에 180여 명의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세계자살예방의 날(9월 10일)을 기념해 열린 자리였다. 영화 상영과 토크 콘서트로 구성된 행사지만 분위기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섰다. 식전 체험 부스에서 시민들이 직접 “생명사랑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자살인식도 퀴즈를 풀며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가벼운 놀이 같으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상영작은 ‘퍼펙트 데이즈’.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포착해 삶의 의미를 되묻는 영화였다. 스크린 속 잔잔한 장면들이 이어질수록 관객석에서는 몰입과 공감의 기운이 흘렀다. 영화를 본 뒤 이어진 영화치료전문가 강혜경 대표의 토크 콘서트에서는 “생명을 지켜내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상의 발견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 또한 자리에서 스스로의 하루를 돌아보게 됐다.
며칠 전에는 황성공원에서 열린 생명사랑 걷기 캠페인에도 참관했다. 170여 명의 시민들이 2.5km를 함께 걸으며 자살예방 전화번호 ‘109’를 외우고, 희망 메시지를 작성했다. 길을 걷는 동안 이웃과 나눈 짧은 대화가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힘들 땐 혼자가 아니에요”라는 한 참가자의 말은 취재수첩에 빨간 펜으로 따로 적어 두었다. 자살예방이란 제도와 정책만이 아니라, 결국은 이런 따뜻한 관심의 연쇄 속에서 살아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그러나 현장은 따뜻했지만, 통계는 냉정하다. 경주시의 자살률은 2021년 인구 10만 명당 26.3명에서 2023년 35.5명으로 치솟았다. 한해 자살자 88명 중 60세 이상이 31명, 남성이 72명으로 80%를 넘는다. 경주가 경북도 내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배경에는 고령화, 농촌 특유의 고립, 남성 가장의 부담이라는 복합적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지난 12일 ‘2025 국가자살예방전략’을 내놓았다. 2029년까지 자살자 수를 연간 1만 명 이하로 줄이고, 10년 내 자살률을 40%가량 낮추겠다는 목표다. 응급실에서 자살 시도가 확인되면 즉시 지자체로 연계하는 체계, 자살유족 원스톱 지원, 부채 조정과 생활안정 지원, 노인 돌봄 강화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경주시의 현실은 단순히 중앙정부 대책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지역 맞춤형 대응이 절실하다.
영화제와 걷기 캠페인에서 만난 시민들은 공통적으로 “함께할 때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했다. 이는 자살률 통계를 꺾을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지역사회 공동체 속에서 고립된 이들을 끌어안고, 일상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작은 행동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예방책이다. 경주시가 도내 1위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상담 창구 확대를 넘어, 마을 단위 돌봄, 남성·노인 중심의 특화 프로그램, 경제적 위기 가정에 대한 선제적 개입이 필요하다.
스크린 속 이야기와 공원에서의 발걸음이 이어져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생명은 함께할 때 지켜진다.” 경주시의 자살률은 여전히 높지만, 영화와 걷기 속에서 찾은 답처럼 지역사회가 힘을 모은다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