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나는 ‘닭’이로소이다 -인간과 닭에 얽힌 사연“수명 10년이지만 인간 위해 35일만에 생을 마감”나는 ‘닭’이로소이다. 나는 새다.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고 채소인 것처럼. 어느 정치인(노회찬 의원)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고 말하더니만 난 분명히 새다. ‘그러면 파리도 새냐?’고도 하더라. 파리는 날기는 해도 새가 아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왜 나만 갖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인간들은 나를 가금(家禽-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새다. 5천년 전만 해도 나는 하늘을 훨훨 날아 다녔다. 매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들쥐를 낚아챘다. 닭이기 전에 나는 새다. 비록 게으름과 안일함 때문에 짐승처럼 돼 버렸지만 나는 새다. 인간이 주는 모이 때문에 굳이 날면서 먹이를 구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잊어버린 탓에 날짐승이 되어 버렸다. 훨훨 날아다니던 시절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우리를 먹는다. 날로(닭육회), 삶아서, 쪄서, 볶아서, 데쳐서, 구워서, 튀겨서 먹는다. 가지가지 종류도 많다. 가리는 부위도 없다. 뼈는 고아서 육수를 내어 짬뽕국물로, 똥집은 잘게 잘라서 구워 술안주로, 발은 양념을 발라 쪄서 닭발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먹는다. 쓸모는 없고 버리기는 아까운 나의 가슴살을 계륵(鷄肋)이라고 한다. 다른 짐승들처럼 나의 갈비도 심장을 보호하는 근육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살이 찌지 않는 고기로 닭갈비살을 즐겨 먹는다. 서양에서는 본래 닭다리보다 닭갈비를 더 좋아한다. 한국인 1명이 1년에 닭고기 15.4kg을 먹는다. 우리가 잡아 먹힐 때 평균 무게는 고작 2kg이다. 한국인 1명이 1년에 닭 예닐곱 마리를 먹어 치운다. 연간 1억 4천마리를 먹는다. 시도 때도 없다. 한여름엔 몸을 보호해야 한다고 삼계탕으로 먹더니 요즘에는 눈오는 날에 ‘치맥’이라며 새로 유행하고 있다. 한국인은 또 1인 연간 계란소비량 254개다. 암탉 한 마리가 1년에 낳는 알 180개를 낳는다. 계란 한판 5천원할 때가 좋았을 것이다. AI 때문에 지금은 1,5000원까지 치솟고 있다. 한국인은 이제 계란 귀한 줄 안다. 미국산 계란이 들여올 모양이다. 맛과 영양의 차이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을 위해 얼마나 싼 값으로 맛과 영양을 공급해 주었는지 이제 확실히 알 것이다. 솔직히 계란만큼 적은 비용으로 단백질을 비롯한 각종 필수 영양소를 공급해 주는 게 있나?
우리는 부화한 지 35일만에 죽는다. 주로 치킨집에 가서 고기가 되는 것이다.(산란닭은 18개월 정도 살지만) 그런데 우리 수명이 얼만지 인간들이 알고나 있는가? 우리 수명은 평균 10년이다. 16년까지 산 우리 선배도 있다. 우리는 생애의 0.83%만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 요절도 이런 요절이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우리에게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알에서 태어나 훗날 건국의 대업을 이뤘다는 당신네 신화를 보면 부아가 치민다.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의 입이 우리를 빼닮았고, 우리 울음소리를 듣고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를 발견했다는데 이 정도면 신라왕국 천년은 우리 덕분이 아닌가? 천마총에서는 달걀 수십개가 나왔다는데 인간들은 죽어서도 우리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당신들은 우리만 보면 입맛부터 다시는가?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또 한국의 SNS에서 ‘닭근혜’가 유행이다. 대통령을 조롱하며 비하하는 비유로 쓰이는데 하필 왜 우리 닭이 등장해야 하는지 섭섭하기 그지없다. 머리가 나쁘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당신네 인간들이 좋아하는 과학적으로 본다면 대뇌의 크기에 비해서 우리만큼 머리가 좋은 동물이 있는가 살펴볼 것을 충고 하고 싶다. 우리는 머리가 나쁘지 않다.
사실 우리는 야맹증 환자다. 깜깜하면 보이는 게 없다. 한밤에 닭서리했던 추억을 떠올려 보면 알 것이다. 우리는 밤에는 아무것도 안보인다. 속수무책이다. 대신에 우리는 빛에는 매우 민감하다. 인간은 느끼지 못하는 빛을 우리는 눈과 피부로 알아챈다. 빛을 느낄 때 우리는 울음을 터뜨린다. 별 뜻은 없다. 동이 틀 무렵 혈액의 농도가 높아지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생리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의 울음소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어둠을 뚫고 새벽을 여니 상서롭다고 한다. 우리를 보고 희망을 말하는 것은 고맙지만 의도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우리 모가지를 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느 정치인의 말은 기분 나쁘지만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신(神)이 아니라고 연신 고개를 저어도 인간은 우리를 한뜻으로 우러러 보기도 한다. 불교는 우리를 고난을 벗고 인간을 구해주는 신으로 소개하고, 스페인의 순례길에는 우리를 기념하는 작은 교회가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우리의 볏은 영예로움을 상징하고 꽁지는 승리를 뜻한다. 그 유명한 베드로의 ‘닭 울음소리’에 우리들의 기운찬 울음이 등장하기도 한다. 인간은 종교, 문화, 인종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기려서일까? 그런데도 종교, 문화, 인종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잡아먹는 가축은 우리 닭밖에 없다.
시계가 없던 시절 인간은 우리 울음소리를 듣고 일과를 처리했다. 새벽 1시 첫울음과 함께 제사를 올렸고, 새벽 5시 울음이 터지면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그러면서도 초저녁에 울면 재수가 없고 오밤중에 울면 불길하다고 투덜거렸다. 그러고도 우리를 잡아 먹었다. 인간이 우리의 허위 시보(時報)에 잠을 설친 인간의 치사한 복수다.
손님이 오면 인간은 우리부터 잡아먹었다. 사위가 오면 우리 중에서도 씨암탉이 대표로 끌려 나갔다. 우리가 없으면 혼인이 안되는 시절도 있었다. 불과 몇 십년 전의 일이다. 우리에게 큰절을 올린 후에야 신랑신부가 합방을 할 수 있었다. 술주(酒)자를 보시라. 닭(酉)이 물(水)을 마시는 것처럼 술을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다. 실천 좀 하시기 바란다. 인간은 아직 닭살이 돋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염소 똥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에게 단백질만 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우리 고마움을 모른다. 조류독감으로 인간은 달걀값을 걱정하지만 우리는 얼마 안되는 일생을 걱정한다. 지난 겨울에 2000만 마리가 생매장을 당했다. 생매장 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인간이 알기는 할까?
고백하건데 우리는 하늘을 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5,000년 전의 일이지만인간이 던져주는 모이에 길들여져 가축으로만 살았다. 안일과 나태의 결말은 너무나 가혹했다.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은 모이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홰를 치며 비상할 것이다. 다시 새가 되어 창공을 날아 갈 것이다. 비로소 우리의 해 정유년(丁酉年)이 밝았다.※ 위 글은 닭띠 해를 맞아 이희훈 저 《한국의 재래닭》을 참고로 쓴 중앙일보의 글을 각색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