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황병기 론(黃秉箕 論)‘동양 음악의 지평을 넓힌 마스터피스’, 뉴욕 카네기홀 가야금 독주회에 대해 ‘신비한 영감으로 가득한 동양의 수채와 같다. 극도로 섬세한 주법으로 울리는 소리들은 음악에 청징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라는 뉴욕타임즈 논평 때문이 아니다.  서울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울법대를 나와 가야금 연주와 창작음악으로 동양음악을 천착한 거장이라는 이유도 아니다. 아들 둘이 서울대 물리학과를 거쳐 하버드와 보스턴대학을 졸업한 세계적인 수학자와 화학자라는 것도 아니다.  지난 1.31일 세상을 하직하기 전 이미 유언으로 “비석이나 비문을 남기지 말라. 세상에 이름이 기억되는 걸 원치 않는다.”며 흔적 남기기를 거부했던 일화 때문도 아니다.  잡기는 일체 못했던 당신이 “나는 재미없는 게 좋다.”며 평생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산 당신의 삶을 특별히 좋아해서도 아니다. 방북 민간인 1호로 김덕수 등과 함께 평양에 서 공연한 음악인이서도 아니다.  음악, 특히 국악에 까막눈인 필자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생전에 당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자신이 하는 일을 놓고 사명감 운운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합니다. 본인의 능력껏 분수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지요.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늘 긍지와 소신을 스스로 찾아감이 윤택하게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내, 혹은 네가 아니라도 할 사람 많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욕심과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인간관계도 멀어지고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사명감 운운’하는 사람을 나 역시 절대로 믿지 않는다. 이원식, 백상승, 최양식 3선을 하지 않아도 경주시는 아무 탈없이 잘 굴러가는데도 불구하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말년에 고생하고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던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명감 운운은 욕심일 뿐이다. 능력과 분수대로 살면 그만이다. ‘현재 나의 위치와 형편이 곧 나의 능력이고 분수’라고 나는 믿는다. 책이나 만들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게 나의 능력이고 분수다.  능력은 되는데 운이 따르지 않아서.....그런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팔자다. 팔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자신의 능력과 분수에 대해 긍지와 소신을 갖고 살아야 된다. 윤택하게 사는 것과 풍요롭게 사는 것은 다르지만 윤택하게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병원이나 감옥에 가지 않고 밥 먹고 사는 거 말이다.“사람들이 너무 채우려고만 하고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않은 것 같아요. 스트레스는 과거와 미래에서 옵니다.  사람들은 현재를 걱정하지 않지요. 그런데 사람은 현재를 산단 말이에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허깨비’에 불과해요.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을 괴롭게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너무 치열하고 악착같은 사람이 근심 걱정이 많지요. 제가 대학생 때 우연히 서점에서 『채근담』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그 구절을 외우고 있어요.”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오매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는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매 기러기가 가고 나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는 일이 생겨야 비로소 마음에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느니라>“저는 기질적으로 그렇고, 받아온 교육도 그렇고 뭐든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승부를 보고 뭔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지독하게 몰두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 구절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지요. 비우고, 버리고, 잊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이 글귀는 제 인생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끼는 책이 『논어』인데, 『논어』의 첫 구절에 인생에 대해 너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배우고,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 제 칠십 평생에 이 말처럼 행복한 인생을 논한 것이 없습니다.  또 배우고 익히라고 하잖아요. 열심히 하라는 게 아니라 쉬엄쉬엄, 때때로. 얼마나 좋습니까? 『논어』는 ‘위대한 것은 평범하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맹자』만 해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어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하는 어조이지요. 그에 비해 『논어』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첫 구절만 해도 ‘아니한가’하면서 상대방에게 의견을 구하는 겁니다. 굉장히 민주적이죠.” -그저 열심히 하면 되지 악착같이 승부를 보려 하면 필시 적이 생기게 마련이다. 악착같이 승부를 보려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세상사다.  스트레스 받아 건강만 해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교육을 받아왔고 그런 풍토에서 살아왔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그 결과 우리는 행복한가? 황병기 교수의 말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열심히 하면 되지 치열하게 살 것까지 있을까? 쉬엄쉬엄 해도 될 일은 된다.감히 논할 처지가 아닌 줄 알지만 황병기 교수를 추모하고자 하는 이유는 닮아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황 교수는 한 마디로 인생을 충실하게 살다 간 분이다. 잠시 찰나의 시간도 허투루 보낸 일이 없이 그야말로 성실과 진실로 인생을 사셨다. 이룰 것은 다 이루었지만 조용히 가셨다.<김영길 편집위원>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