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친구론(親舊論)“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훨씬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돼요. 이십 대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그 친구들과 앞으로도 많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렇잖아요. 다 헛돼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이런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모든 도시를 다 가보고 모든 음식을 다 먹어보고 그래도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해요. 밤새 술 먹고 그런 거 안 했어야 하는데.
그때에는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공허한 술자리에 술 먹고 밤새고 동아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아리는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잘만 굴러가요. 지금도 잘만 있더라고요. 그때에는 당시에 대단한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요. 앞으로 동아리는 어떻게 될까를 논의하고 그랬어요. 어릴 때의 친구들은 더 배려도 없고, 불안정하고 인격이 완전하게 형성되기 이전에 만났기 때문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막 대하고 함부로 대하는 면이 있어요. 가깝기 때문에 좀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일 수도 있죠.”“난 남자들이 많은 곳에 가면 불편하다. 여자들이 관계지향적인 데 반해 남자들은 지배를 원한다. 서열을 정하지 않으면 30분도 앉아 있지 못한다. 만난 지 30분만에 선배라면서 ‘영하야, 말 놔도 되지’ 이러는 거 너무 싫다.”“난 여성적이다. 남자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정치, 축구, 도박을 싫어한다.”“남성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산다는 거다. 그건 너무 피곤하다. 90년대 이후 최소한의 사람들과 최소한의 관계만 맺고 산다. 정치활동도 안 하고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문단에서도 신경숙, 은희경, 배수아 같은 여성작가들과 더 친하다.”본래 제법 유명했지만 <알쓸신잡>에 출연하여 더욱 알려진 소설가 김영하 씨의 말이다. 나도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 아니어도 역사의 물결은 도도하게 잘 굴러가는데도 불구하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우며 토론한 게 몇 날이었으며 소주병은 또 몇 병이나 넘어뜨렸던가? 나 하나 제대로 투표나 잘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돌아보면 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자만이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든가 책을 보든가 영화를 보았더라면. 아니면 거리를 걷든가. 그러면 김영하의 말대로 영혼이 더 풍요롭고 충실하지 않았을까?나는 동기들 만나는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서로 잘 났다며 서열 매기기에 역력한 모습이 역겹다. 대부분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도토리 키재기인데도 말이다. 돈, 사회적 지위, 자식, 가문 등 은연중 친구들보다 우월성을 내세워 차별화하기 위해 혈안이다. 짐승들도 똑 같지만 남자들의 본능이다. 친구 간에는 본질적으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친구는 영원한 경쟁자라고 하지 않나? 친구가 쓰러져야 자신이 앞서기 때문이다. 쓰러진 친구를 위로한다고? 그게 위로인가 약 올리며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거지. 어떤 부인이 죽으면 가장 먼저 덤비는 자가 신랑의 친한 친구 아닌가? 위로 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나이 환갑이 되어도 40년전 20대 때의 모습과 똑 같다. 나이만 들면 뭐하나. 철이 들어야지. ‘좋아하는 친구보다 씹는 친구가 더 많다.’는 어느 무속인 말에 대해 경험적으로 전적으로 인정한다. 살아보니 그러하거늘 어쩌랴. 그러면 친구는 왜 만날까? 심심하고 무료할 때는 그래도 친구가 낫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송무백열(松茂栢悅-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 벗이 잘 되면 기뻐한다는 듯의 비유)하는 친구 두 세 명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서로 잘 났다고 서열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친구보다 선·후배 만나는 것을 나는 더 좋아한다. 선·후배 간에는 이미 서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편한가. 선·후배 간에도 서열 따지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후배가 선배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덜 피곤하다. (친구도 싫고 선·후배도 싫으면 동호인 만남이 제격이다. 나이, 돈 관계없이 뜻이나 취미만 같으면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서 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늙으면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카톡에서 늘 주장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한 친구보다 선·후배가 편하고 동호인이 재밌다. 이웃도 있고 친·인척도 있는데 친구 없을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까짓 거 혼자인들 어떠랴. 바람도 있고 하늘도 있고 책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