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손미옥 씨의 행복기원전 384년에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의 2천년 동안 서양 사상사를 지배하면서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며 ‘행복추구론’을 말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행복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배웠고 또 그렇게 인식하고 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에 2천년 동안 감히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어서 진실인줄로만 알았는데 최근에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많이 바뀌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야 행복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시작됐다. 톨스토이, 러셀, 카네기 등의 행복론이 그것이다. 파랑새나 무지개를 찾아 먼 길을 떠난 사람들 모두 허탕치고 돌아와 보니 바로 집에 있더라는 이야기처럼 행복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적 경험에 있다는 것이 대세론이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세 가지 의문을 던지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 가장 중요한 사람은 ‘현재 옆에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이라며 현재진행형이 곧 행복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러셀은 20세기 최고의 지성인답게 행복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분석했고, 카네기는 ‘과거와 미래의 창문을 닫고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며 역시 경험론을 중시했다. 카네기는 또 ‘안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며 현실론도 제시했다. 모두 행복은 ‘현실적 경험’에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 행복연구에 대한 100대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서은국 교수(연세대-서 교수의 강의는 재미가 없다고 공언하는데도 늘 700명 이상의 강의 대기자가 몰려있다고 한다.)의 저서 <행복의 조건>에서 서 교수는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전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론적 행복론을 정면으로 배척한다.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이 자연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라며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으로서 ‘행복은 사소한 즐거움의 연속’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현재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연속되면 최상이지만....서 교수에 의하면 최근에 실시한 어느 조사를 근거로 한국인이 하루 동안에 즐거움을 느끼는 두 가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먹을 때와 대화할 때’란다. 한 마디로 풀어서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히 행복한 것)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생활의 균형), 욜로(You only live once-당신은 오직 한번뿐인 순간에 살고 있다. 지금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가 널리 퍼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덴마크의 휘게(Hygge-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아늑한 시간. 덴마크 사람들이 지향하는 여유롭고 소박한 삶의 방식)와 비슷한 삶의 스타일이다. 이들은 현재의 재미있는 삶을 추구한다. 이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래의 행복은 불확실하다고 믿는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도 이들의 강령이다. 이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함은 적(敵)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소소하다는 의미는 반드시 규모의 작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르다. 거부 소로스에게는 수천만원짜리 만찬도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일 수 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범위가 소소함이다. 중용(中庸)이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재미 있는 삶’도 좋지만 ‘의미 있는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행복론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루이지노 브루니(이탈이아) 교수에 의하면 사유재(私有財)보다 관계재(關係財.Relationship Goods)의 비중이 행복을 느끼는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사랑, 우정, 가족애, 동료애, 이웃간의 정(情) 등이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것이다. 지위나 소득이 높아지면 어느 시점부터 관계재는 감소한다는 근거도 내놓고 있다. 쉬운 예로 대기업 임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친인척이나 동기들의 경조사에 참석하여 정(情)나누고 살기는 포기해야 한다. 이들 학자들에 의하면 세계적 평균으로는 GNP 1만 5천달러 수준의 나라 국민들이 가장 행복지수가 높다고 한다. 그 이상 GNP가 올라가면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진다는 이론.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부탄과 방글라데시 등의 경우가 예다. 소득이 낮아도 행복지수는 높다. 소득으로만 따진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가구당 연소득 1억 8백만원 정도가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정점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그 이상은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지더라는 것. 우리나라의 1인당 GNP가 2018년 3만 1,349 달러(3인 가구로 치면 9천 9백만원 정도)가 되어 1억 8백만원에 근접했으니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최고로 높아야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소득의 불평등 때문이다. <논어>에서 공자(孔子)가 말한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백성들은 적은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처럼 말이다. 국민 상위 10%가 차지하는 소득이 1979년에는 28%였지만 2016년에는 48%다. 지니계수 즉, 소득 불평등이 심해졌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일”이라고 서은국 교수와 행복론에서 맥을 같이 했다.(그러나 사족(蛇足)이지만 필자는 김형석 교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987년 6·10 국민대회 전날 김 교수가 재직하던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져 죽었을 때 같은 학교 교수로서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일평생 호사를 누렸기 때문이다. KBS <인간극장>을 보니 자식들은 모두 미국에 살고 있고 본인은 고액의 연봉과 강의료를 받으며 아직까지 부귀를 누리고 있다. 나는 김형석 교수가 평생 나쁜 일은 하지 않았지만 정의로운 일 역시 하지 않았다고 본다)손미옥 씨에게 필자는 감히 행복을 발견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좋은 사람들과 늘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재미있고 즐겁게 지낸다. 도울 일이 있으면 힘껏 나서서 돕는다. 어설픈 남자들에게 술 얻어먹고 다니는 일이 없다. 시장 모퉁이에서 나물을 팔고 있는 시골 할머니를 보면 꼭 필요하지 않지만 깍지도 않고 그 나물을 다 팔아준다. 감성적인데다 표현력도 남다르다. 본인의 화제거리도 다양하지만 남의 이야기도 맞장구를 치며 곧잘 들어준다. 마초 스타일의 신랑도 잘 보살핀다. 서울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아들이 해준 노란 염색머리를 휘날리며 오늘도 서라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