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서울 기득권과 시골의 천한 백성조선 후기의 천재를 꼽으려면 단연 정약용(1732-1836)을 따라올 자가 별로 없다. 성리학 외에도 의학과 기술 등 다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애민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목민신서>와 <흠흠신서> 등의 저서 또한 역사시간에 외워야 할 필수 항목이었다. 정약용은 특히 유배생활에서 피폐한 농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는 백성들의 삶의 향상을 위하여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을 주창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약용은 서울의 기득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신유사옥(1801)으로 전라도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용이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에게 <서울에서 살도록 하라>라는 제목으로 간곡하고 애절한 편지를 썼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주는 훈계이자 삶의 지침 같은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지만 정약용처럼 일반 백성을 사랑한 분이 과연 이런 편지를 썼을까 싶은 의구심이 든다.“중국의 문명이나 풍속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이나 변두리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데 방해받을 일이 없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서울의 문밖에서 몇 십리만 떨어져도 태고처럼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하물며 멀고 외딴 곳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정약용은 서울에서 몇 십리라도 떨어져 있으면 원시적이라며 지방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어떻게 하든지 서울 한 복판에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정약용은 이어 아들에게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내가 요즘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만 사람이 살 곳은 오직 서울의 십리 안팎뿐이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동안 서울 근교에서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으면서 삶을 유지하다가 자금이 점점 불어나면 서둘러 도시의 복판으로 들어간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정약용은 서울 외에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고 단적으로 말한다. 어떻게든지 서울로 진입하라고 충고한다. 아들에게 설마 거짓말을 했겠는가?정약용의 아들에 대한 충고는 이어진다.“부하고 귀한 권세 있는 집안은 재난을 당하여도 눈썰미만 찡그리지 이내 평안하여 걱정 없이 지내지만 재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 시골 깊은 산속으로 낙착하여 버림받는 집안은 겉으로는 태평이 넘쳐 흐르는듯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근심을 못 떨치고 살아간다.” 정약용은 부와 권세를 최고의 가치로 친다. 힘없고 돈 없는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대개 그늘진 깊숙한 골짜기에는 햇빛을 볼 수가 없고(임금의 손길이 미칠 수 없고) 함께 어울려 노는 사람이 모두 쓸모없는 무지렁이들(벼슬길이 막힌 집안)인데다가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지식이란 실속 없고 비루한 내용뿐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아도 어느 누가 돌봐주겠는가” 이쯤 되면 정약용의 지방(시골)사람에 대한 경멸은 극에 이른다. 시골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시골생활에서의 인간교제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정약용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편지의 마지막까지 시골에서 살면 인생의 낙오자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훈계하고 있다. 정약용의 자식 사랑이 절절히 느껴진다.“진정으로 바라노니 너희들은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당대에 벼슬하는 사람과 다르게 생활해서는 안 된다. 자손 때에 이르러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고 마음 든든히 먹어야 하고 나라를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할 뜻을 품도록 해라. 세상원리는 늘 돌고 돈다.
한 번 넘어진 사람이 반드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바삐 서둘러 시골로 이사를 가버린다면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것이다.” ‘당대에 벼슬하는 사람과 다르게 생활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어찌 하든지 기득권에 빌붙어라는 말이 아닌가. 다음 대에라도 서울에서 벼슬하기 위해서는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기득권과 교제하라는 뜻이다.조국 가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기득권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과 정보와 인맥이 있으니 안 되는 일이 없다. 고려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기득권은 거의 대부분 서울과 서울 주변이 차지했다.
요즘은 도시화의 발달로 경기도까지 서울권으로 친다. 이른바 수도권이다. 경기도에 사는 사람들도 은근히 부산이나 대구를 지방으로 부르면서 낮춰 본단다.
며칠 전 통계청의 발표를 들으니 올해 전국 도시인구의 1인당 연소득이 2천 2백만원으로 서울이 1등이란다. 지난해까지는 고임금 노동자가 많은 울산이 1등이었는데 서울에게 자리를 내줬다.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도 가장 예쁜 여자도 서울에 다 있다. 서울로...서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