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사실과 의견, 그리고 사랑·희망·꿈·미래<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등 4편의 역사소설을 쓴 소설가 김훈이 최근 어느 대학에서 한 강연내용이 신문에 실렸는데 요약하고 감히 토를 달아본다.
김 작가는 “우리 시대에 가장 더럽고 썩어빠진 게 언어”라고 전제하고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을 함으로써 말을 하면 할수록 인간관계는 단절 된다”며 말을 할 때 “그것이 사실인지, 근거가 있는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인지 구분하지 않고 마구 쏟아내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 수 없는 말이 된다”는 주장이다. 김 작가는 이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이유는 그 인간의 생각이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당파성을 정의·진리라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공감 100%다. 평소 대화에서도 그렇지만 폐이스북에서는 더 심하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정체성이나, 믿고 있는 종교관에 대해서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글이 올라오면 짜증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의 생각을 마치 정의이거나 진리인 것처럼 글을 올리면 안 된다. 김 작가의 말처럼 의견을 마치 사실처럼 주장해서도 아니 된다. 개인의 의견인 만큼 선택은 글을 읽는 사람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설득력이나 호소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가짜뉴스를 올리는 폐친은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김 작가는 또 ‘여론조사 결과’를 우리 시대 최고의 권력으로 꼽았다. 모두가 여론조사의 결과에 집중하고 함몰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최고의 권력이자 최악의 괴물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정말 무지몽매한 세상으로 가는 시작”이라는 김 작가는 여론의 중요성보다 여론조사의 폐해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여론을 믿고 추진하는 정책도 위험하고 여론을 듣지 않고 추진하는 정책도 위험하다며 균형과 중심을 강조한 뜻으로 해석된다. 정책이나 과제가 여론의 눈치를 살펴서는 곤란하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여론조사 기관만 바쁘게 됐다. 선거가 다가오니 우후죽순처럼 여론조사 기관이 늘어나는 이유가 있다. 이어 김 작가는 자신의 글이 가지는 힘은 ‘검증할 수 없는 단어를 버리는 것’에서 온다며 “글을 쓸 때 내가 검증할 수 없고, 내 생애로 확인할 수 없는 단어를 절대 쓰면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며 그는 “글을 많이 썼지만 사랑·희망·꿈·미래와 같은 단어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앞으로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희망적인 고백도 곁들였다. 희망·꿈·미래는 미래의 일이고 불확실하니까 그렇다 치더라고 사랑은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사랑도 변한다는 이유로 사랑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궁금하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단어도 생애에서 확인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말인데 사실인지 궁금하다.
대단하다. 역시 사람은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고 통찰하기 위해서는 공부(工夫)와 사유(思惟)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랑·희망·꿈·미래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니 놀랍다. 정말 그랬던가? 김 작가의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우리 사회에서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인데 말이다. 김 작가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빈다는 이야기와 오로지 연필로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사랑·희망·꿈·미래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니 충격이다. 우리나라 종교인들과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밥 먹듯이 부지기로 쓰는 말인데..... 김 작가에게 사랑·희망·꿈·미래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까? 마지막으로 그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요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서 언급했다.
1948년생인 김 작가가 3살 때에 6.25가 일어나 7박8일 동안 피난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지붕까지 피난민으로 가득찬 기차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는 반면에, 일부 자산가들은 피아노와 전축기를 싣고 부산으로 갔는데 그 자식이 그 피아노로 연습하여 음대교수가 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훗날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나는 이런 나라의 가난과 억압을 물려받고 살았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시대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두려움이다”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도 기득권 사회의 특권이 변하지 않고 여전히 고착화 되어만 가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꼬집은 듯하다.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을까? 그래서 사랑, 꿈, 희망, 미래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는 것일까? 김 작가는 마지막으로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현상에 대해 “노동자의 안전문제를 걱정하는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지만 “내가 앞장서서 단체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아니고, 젊은 활동가들이 부탁하는 대로 한다”며 “그 젊은이들이 떠미는 대로 내가 밀릴 수 있게 기꺼이 몸을 내주고 있다”고 마무리했다. 사회발전을 염원하지만 나이와 경륜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