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비석이 땀을 흘린다고?초대 국립생태원장을 지낸 최재천 교수(54년생. 최 교수는 2007년 서라벌문화회관에서도 강의를 한 적이 있다)는 진화생물학자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자다.  여러 책을 썼지만 그 중에서 <개미 제국의 발견>은 베르베르(61년생)의 <개미>보다 많이 팔렸다. 한국에서가 아니고 미국과 영국에서다. 베르베르의 <개미>는 200만부가 팔렸는데 한국에서만 100만부가 팔렸다. <신>, <나무> <제3인류> 등 베르베르가 쓴 책의 판매부수 1,500만부 중 3분의 1이 한국에서 팔렸다. 마이클 센델(53년생)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 넓은 미국에서 고작 11만부가 팔렸는데 한국에서 100만부나 팔렸다.  베르베르와 센델 모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데 자기 책의 홍보와 함께 한국인이 그 만큼 팔아준 데 따른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한국인의 독서취향은 좀 독특하다. “신(神)은 죽기 전까지 고민해야 할 문제”, “인간의 역사는 신으로부터 끊임 없이 멀어지려는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 돌아가려는 운명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라는 최 교수 본인은 과학자로서 무신론자이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신은 알 수 없다)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이다.  최 교수는 하버드대 한국 최초의 동물학 박사로 미시간대 조교수를 지내다가 서울대를 거처 현재는 이화여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로 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내 강원도 동감댐 건설 취소에 이어, (물론 여성단체들의 활약이 컸지만) 2005년 호주제 폐지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온전히 암컷으로부터 온다. 생물의 계통을 밝히는 연구에서는 철저하게 암컷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호주제의 근간으로 치부되는 부계혈통주의는 생물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게 논거였다. 동물과 사람이 어찌 같을 수 있느냐는 이유로 유림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후로 딸과 함께 시집간 여자들도 남자와 똑 같은 재산권을 가질 수 있도록 민법이 개정됨으로써 아들이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누나와 여동생의 인감과 도장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시집간 딸도 문중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됐다.자연계에 대한 탐구와 함께 동물이 살아가는 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한 최 교수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사뮤엘 존슨의 <상호허겁(相互虛怯)>을 제시했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려면 적당히 두려워하고 약간은 비겁해져라’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결국은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최 교수는 ‘나를 너무 알려주지도, 상대방을 너무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라는 책에서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제 욕심만 차리지 않고 가능하면 남하고 같이 사는 걸 추구해도 뒤처지거나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로 인생의 핵심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최 교수에 의하면 자연계의 동물이나 식물 모두가 그렇단다. 대단한 통찰력이다. 인생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강조한 올해 100세를 맞이하는 김형석 교수의 말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이 역시 필자의 생각이다. ‘성실하게 살라, 정직하게 살라, 부지런해라, 착하게 살라’는 등등의 말은 솔직히 고리타분하고 지겹지 않는가?‘인간이 함께 살아가려면 적당히 두려워하고 약간은 비겁해져라’-비리나 부도덕과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과는 좀 차원이 다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적당한 요령과 기술은 필요하다는 말로 쉽게 해석하고 싶다. 적당히 약게 살아야 한다는 듯으로도 이해된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그렇다고 한다. 상호간에 적절한 경계와 긴장을 유지하는 게 질서와 평화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동물의 생존 자체가 그러하다는 설명이다.  ‘비겁한 만큼 행복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비겁해야 한다는 데 그 기준이 애매하다. 그 기준을 알아가는 게 삶의 과정이고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적당히 두려워하고 적당히 비겁해지자. 자연계가 그렇단다. ‘나를 너무 알려주지도, 상대방을 너무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묘한 설득력이 있다.  나를 다 내보일 필요도 없고 남을 다 알 필요도 없다. 나의 카드를 상대에게 다 보여줘 버리면 긴장감과 재미가 덜 하다. 상대의 카드를 내가 다 알아도 싱겁고 재미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적당하게 상대방에게 솔직하고 상대의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자. *사뮤엘 존슨(Samuel Johnon. 1709-1784. 영국의 작가)은 ‘상호허겁(相互虛怯-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라고 설파했다. 힘의 우위가 뚜렷한 사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언제든 틈만 보이면 뚫고 나가려는 분노의 용암이 들끓고 있다.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이 같은 힘의 균형을 깨고 홀로 거머쥐려는 속내를 내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 동안 관찰해 온 자연은 그렇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자연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나는 이 약간의 비겁함을 제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p129. 허겁(虛怯)은 ‘실하지 못하여 겁이 많음’이라는 한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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