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이보다 좋을 순 없다’조선 초기 명재상(名宰相)으로 손꼽히는 남원 출신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 고려 말 신하로서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광덕산 자락의 두문동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생을 마감한 72명의 중에서 30세로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에게 “자네는 장래가 촉망되니 세상에 나가 백성을 구하라”는 선배들의 타의 반과 자의 반으로 조정에 나가 벼슬을 시작한 것부터가 그랬다. 황희 정승의 관직생활도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몇 번의 삭탈관직과 유배에 이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요즘 말로 청탁·회유, 사건 은폐와 축소, 뇌물수수 등으로 몇 번이나 파직도 당했고 귀양살이에 이어 의금부(요즘의 검찰)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의 공신도 아니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한마지로(汗馬之勞)의 공도 없는데, 24년간의 재상에 이어 69세부터 87세까지 18년간 영의정을 지내고 93세에 별세했으니 살아서는 영광이요 죽을 때는 천수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태종, 세종, 문종 세 임금을 섬긴 황희 정승은 청렴결백하여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청렴하면서 행정능력과 처세에 탁월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태종과 세종은 한결같이 황희 정승이 약간의 허물은 있으나 종묘와 사직 즉, 조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 여기고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추호 김종인김종인의 별명 3개가 있다. 첫째는 ‘추호 선생’.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다섯 번이나 지냈다. 셀프 공천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했던 말이 “내가 비례대표에 욕심이 있겠느냐,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한 말에서 생긴 별명이다. 다음은 ‘여의도 프레스토 검프’. 정치적 고비와 길목마다 김종인이 키포인트를 행사한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늘 역사적 전환기의 중심에 서 있는 영화의 주인공 프레스토 검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어찌됐는지 정치적 전환기마다 김종인이 떡 버티고 있다. 김종인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된 박근혜와 문재인이 김종인을 모시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야만 했다. 황교안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집터가 좋아서 그런가? 다음은 ‘전권노인네’. 여야를 넘나들며 비대위원장이나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할 때마다 김종인이 하는 말 “전권을 다오. 그렇지 않으면 못한다.”에서 유래된 별명이란다. 얼마 전에 또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을 수락하기 전에 “기한도 정하지 말고 전권을 달라”고 했다.
세 임금을 섬긴 황희 정승보다 단수가 훨씬 높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7명의 대통령에게 부름과 역할을 했으니 ‘황희 정승은 저리가라’ 게임도 안 된다. 대통령은 못 되었지만 안철수, 황교안까지 구애를 했으니 가히 천하의 중심을 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0년 생으로 아직도 건강하니 앞으로 또 누가 모시려고 할는지 알 수 없다. 대단한 어른이다. 김종인도 황희 정승처럼 감옥에 다녀왔다.
1993년, 다 쓰러져가던 동화은행에서 2억 1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다가 2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최근 홍준표가 페이스북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 영입을 반대하면서 “내가 검사시절 담당이던 함승희 검사의 부탁을 받고 김종인을 취조했는데 20분만에 자백을 받았다”는 바로 그 사건이다. 홍준표가 김종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면서 노골적으로 ‘노욕에 찌든 부패한 인사’로 디스하고 있다. 앞으로 두 사람의 싸움도 볼 만하다.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는 13대 서울 ‘관악구 을’에 딱 한번 출마했는데 당시 평민당 간판으로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한 38세 이해찬에게 패배했다. 그 트라우마 때문에 20대 공천에서 이해찬을 공천에서 배제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종인은 몇 년전 언론에서 대통령 출마선언을 했다가 보름만에 거둬들이기도 했다.
김종인은 다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가인(街人) 김병로의 손자다.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던 부친 김재열이 별세하자 당시 5살이었던 김종인에게 “너는 아버지가 안 계시지만 그래도 너를 돌봐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지 않느냐. 조금도 외로워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를 잘 하면 밥 굶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다는데 그 가르침처럼 밥은 굶지 않고 있다. 공부머리는 조부나 부친처럼 좋지 않았는지 외대 독문과를 나와 독일 뮌스터 대학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에서 32살에 조교수가 되었고, 수 십번의 맞선을 봤으나 실패하고 고인이 된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의 소개로 한일은행장의 딸인 이화여대 김미경 교수와 35살에 뒤늦은 결혼을 했다. 김종인 본인도 국민은행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명문가로서 친인척 중에 정부부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종인은 재벌위주 압축성장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70년대 고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등 이른바 1세대 서강학파와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의 주창자로서 사강학파 2세대라고 볼 수 있다. 70년대 후반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민의료보험 시행을 건의하여 현재의 의료보험 초석을 마련하였고, 1987년 민주화 헌법 제정시 119조 2항에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와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넣어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도입한 공로가 크다. 이 <경제민주화>로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켰으나 박근혜가 당선되자 곧바로 폐기시켰다며 날선 비판을 한 적도 있다.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지금도 시대정신을 읽은 탁월한 안목으로 평가 받고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 때에는 정치권과 재벌의 치열한 음해에도 굴하지 않고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에 대한 과세와 문어발식 확장에 제동을 걸어 우리나라 경제의 균형발전이라는 토대를 마련한 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기조인 <소득주도성장>의 토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종인의 경제철학이라고 나는 믿는다. 20대 민주당 비대위원장 때는 이해찬과 정청래를 공천에서 쳐냈으나 이해찬은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정청래는 이번 선거에서 권토중래하여 살아 돌아왔다. 목을 날렸던 이해찬과 정청래가 민주당 실세이니 앞으로 이들의 싸움도 볼 만할 것이다. 이름하여 관전 포인트다.
지나고 보면 김종인의 21대 총선에서의 역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김종인은 총선에서 조국 교수에 대한 불공평 논란이 국민들의 최대의 관심사로 보고 ‘조국을 살릴 것이야, 경제를 살릴 것이냐’는 프레임으로 국민감정을 자극시켜 표를 모을 심산이었으나 큰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함으로써 대패했다. 예기치도 못했던 코로나가 방해를 했다. 국민 다수는 국가가 국민을 잘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도 이제 노쇠한 것일까? 김종인은 4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81세인데 90세까지 나랏일에 관여하고 93세에 별세한 황희정승과 비교하여 두고 볼 일이다.핏대 이해찬이해찬의 별명은 ‘핏대’, ‘버럭’, ‘해찬들’, ‘킹 메이커’ 등이 있다.치밀하고 전략적인 사고를 가졌지만 성품이 부드럽거나 참을성이 부족한 데서 나온 별명이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재직시에 구청 공무원이 실수를 했는데 부시장실에 불러놓고 무릎을 꿇게 한 뒤에 따귀를 때린 일화와 함께 취재에서 실수한 기자의 뺨을 후려갈긴 일도 있다. 관악구청장에게 물컵을 던진 적도 있다. 버럭거리며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에다 마음에 차지 않으면 핏대를 세운다는 성격에서 유래한 것 같다.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성격이라는 의미에서 ‘해찬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킹메이커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머리가 아주 명석한 사람”이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전략적 사고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거기획과 전략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을 정도다. 20대 총선에서 김종인에게 공천에서 배제되었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좀 교만스럽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선거에서 왜 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7전 전승, 김재광 의원 8전 전승에 이어 우리나라 선거 역사에서 2등이라고 볼 수 있다. 8선도 있고 9선도 있지만 모두 한 두 번씩 낙선한 이력을 갖고 있다. 정몽준 의원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7전 전승이지만 서울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바 있다. JP는 비례, 지역구를 합쳐 9선이지만 그 자신 비례 1번을 받고 떨어진 적도 있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패했다. 여하튼 선거의 귀재라고 불러도 틀림없다.
지난 21대 총선도 그렇다. 그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죽을힘을 다 했다. 마치 생의 피날레를 성공적으로 장식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것처럼. 몸은 무거웠고 말은 어눌했지만 형형한 눈빛은 살아있었다. 생의 마지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과 전투력이 빛났다. 말 그대로 사투(死鬪)였다. 이낙연 전 총리의 인기에 밀려 그의 지원유세를 부탁하는 후보자도 별로 없었지만 선거 하루전날인 4월 14일 스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후보의 충북 영동의 유세장을 찾았다.
“곽상언 후보가 여기를 선택한다고 할 때 참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30년 동안 일하면서 그 분이 얼마나 정의롭고 공적인 분인지 역력히 봤습니다. 13대 국회부터 시작해서 제가 총리를 할 때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30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터무니없이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와서 이제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전장에서 사라지는 노병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몸이 불편해도, 당선 가능성이 없어도,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에게 마지막 지원유세를 가야한다는 인간의 정리(情理)가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음은 나중에 알게 됐다. 32년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소회처럼 들렸다.
총선 압승 뒤에는 혹시라도 자만하다가 늪에 빠진 열린우리당의 전례를 밟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겸손과 감사의 말을 입에 달고 지낸다. 선거를 대승리로 이끈 장수에게 있는 환호나 기쁨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자기가 뿌린 새끼가 다치지나 않을까 조바심하는 부모 같은 심정이 엿보인다. 언론이 이낙연 총리에게만 관심을 가져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측근 김현 전 의원과 이강진 전 세종시부시장이 공천에서 낙마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시스템 공천을 완성시켰다. 민주당에서는 공천에 불만을 품고 당을 배신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공천에 대해 시비를 걸지 못했다. 노병은 이제 8월이면 화려했던 정치생활을 접고 외로이, 쓸쓸히 퇴장할 것이다. 7선 무패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 당 대표 등의 32년 정치인생 명함을 내려놓을 것이다.이해찬은 52년생으로 우리나이로 69세다. 그런데 아주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몸이 불편해서 일게다. 학생운동 시절 주변에서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두드려 맞은 고문후유증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충남 청양군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이인용은 야당 출신으로는 드물게 자유당 말기에서 4.19까지 민선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일본유학을 한 엘리트였는데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꼿꼿한 선비로 전한다.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자퇴를 하고 다음해인 1972년 다시 시험을 쳐서 사회학과에 다니던 중 그해 10월 17일 유신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내려온 아들을 두고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이 데모를 하지 않고 집에는 왜 왔느냐”는 꾸지람을 들은 이해찬은 그 길로 서울로 가서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7,80년대 대학생을 둔 부모들이 혹시나 자식이 데모에 가담하여 신세를 망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 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14만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 학생운동과 시회운동, 출판 등 사회개혁 운동을 하다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민당 후보로 38세의 나이에 처녀출전하여 당선된다. 당시 선거에서 여러모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민정당 김종인 후보를 꺽는 기염을 토했다. 서울 관악구 ‘을’에서다. 이해찬에게는 첫 당선이었지만 김종인에게는 첫 패배였던 셈이다. 두 사람의 인생은 여기서 꼬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32년의 세월이 흘러 지난 4월 15일 두 노장 정객이 당대표와 선거대책위원장 자격으로 맞붙은 총선에서 이해찬이 승리했다. 피날레는 이해찬에게 돌아갔다.
이해찬은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감옥에서 2년 반 정도 복역했지만 돈과 관련해서는 아주 초연했다고 전한다. 그 대신 골프를 좋아해 몇 번이나 구설수에 오르더니 급기야 총리까지도 내려놓아야 했다. 국무총리 정무비서관실 국장이었던 고 정두언 의원은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에서 제 역할을 한 총리로 이회창과 이해찬을 꼽았다. 대한민국 노정객 김종인, 이해찬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