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여행은 그냥 음악과 같다’마흔 일곱은 광기와 무력감이 뒤섞인 나이라고 했던가.마흔 일곱 살 사내에게 다가온 ‘실직’과 ‘아내와의 불화’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수시로 우리 삶에 찾아오는 평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인생궤도를 확 바꿔버릴 수도 있는 특별한 사건일 수도 있다.
대학강사 K는 마흔 일곱이 되던 어느 날, 자신이 출강하고 있던 대학으로부터 수강생이 적어 폐강한다는 통고를 받는다. 아홉 달 전부터 별거 중인 아내에게 전화를 걸지만 헬스장에서 만난 이러저러한 남자와 여자들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인생은 지루하고 허무하고 쓸쓸했다. 불면의 밤으로 뒤척이던 K는 술병을 드는 대신 갑자기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상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어쩌면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소형 벤을 타고 국토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이왕이면 ‘이국 땅에 홀로 던져진 듯한 고독감을 맛보기 위해’ 넓고 쉬운 고속도로보다 좁은 국도길을 따라 ‘자칫 한 눈을 팔면 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평범한 마을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K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6년째 배를 만들면서 세상을 유람할 꿈을 꾸고 있는 부부, 벼랑 하나 달랑 메고 다니면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증권맨 출신의 운명론자, 열 명이 넘는 남자를 만났지만 모두 배신을 당했다면서도 남자가 좋다는 소줏집 여주인, 하나님을 믿지만 중국 출신의 어느 메시아를 받드는 기독교인....등
나홀로 여행은 고행(苦行)이었다. 광대한 대지 앞에 선 인간의 왜소함에 몸을 떨었고, 무시무시한 장대비가 차의 강철 지붕을 때리는 칠흑 같은 밤에는 두려움에 밤을 지샌다. 입에 곰팡이가 나도록 말을 하고 싶을 날에는 아무데고 들어가 누구에라도 이야기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K는 여행(travel)과 고생(travail)이란 단어가 어원이 같다는 호머의 싯구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미칠듯한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자제력을 상실했다고 토로한다.
그 절대고독 속에서 광막한 길을 달리며 그가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일상에 대한 눈뜸’이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삶의 진정한 의미는 비범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세숫대야를 타고 대양을 건넌 것도 아니고, 낙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사막을 횡단한 것도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남아메리카를 횡단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내 나라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본 것이었다. 그가 본 것은 다름 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눈으로 보는 세상 속에 담긴 깊은 통찰이었다.
‘여행은 그냥 음악과 같다’(시골의 어느 허름한 카페의 주인), ‘날씨가 거칠어야 좋은 재목과 인물이 난다’(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던 어느 백발노인), ‘도시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마을에선 별 중요한 일이 안 일어난다고 생각하나보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 간난애의 출생, 시시한 인간들의 죽음, 뭐 이런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시골의 어느 별정 우체국장).....그가 떠나기 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일상,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그 일상 속에는 이렇게 보석 같은 언어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K는 긴 여행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국토 횡단이 아니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기로 결심한 것도 제자리로 돌아오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여행길에서 그는 자신을 좁은 영역에만 가둔 채 절망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자기 자신)을 보았으며, 늘 자기만 생각하고 고집을 앞세웠던 것을 후회한다. 그가 여행을 통해 얻은 미덕(美德)은 ‘양보’였다.
폐쇄된 자아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듯이 그는 여행을 통해 ‘나만의 틀’에서 벗어나 ‘영혼의 눈’을 떴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일 수가 없다는 것도 여행에서 얻은 경험이 되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다른 학교에 일자리를 얻고, 전처와는 사이좋게 헤어지고 새 아내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