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가 제4기 원전범시민대책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키며 원전 정책에 시민의 참여와 목소리를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데 다시금 시동을 걸었다. 지난 8일 위촉식을 시작으로 2년간의 임기를 가진 제4기 위원회는 학계, 언론, 의회, 시민단체 등 각계 전문가와 지역 인사로 구성돼, 원전과 관련된 지역 현안에 대한 자문과 의견 수렴, 정부 정책에 대한 대응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경주가 단순한 ‘수용지’가 아니라, 원전 정책의 ‘참여 주체’로서 위상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움직임이다. 원전의 안전성과 지속 가능성, 사용후핵연료의 처분 문제는 더 이상 기술자나 중앙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안인 만큼, 시민들의 참여와 사회적 합의 없이 어떤 결정도 성공할 수 없다.
제2기부터 본격 가동된 범시민대책위원회는 과거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반출 약속 불이행, 고준위특별법 제정 지연 등 원전 정책 과정에서의 지역 소외에 대한 시민사회의 분노를 대변해 왔다. 2022년 공청회 참석, 2023년 고준위법 제정 반대 성명서 발표 등은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이 지역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일방통행하는 데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였다.
특히 지난해 말 위원회가 고준위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여야 협치를 통해 대승적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친 결의문은 시민들이 감내해온 고통과 희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정부는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 당시 고준위 폐기물 반출을 약속했지만, 이는 아직까지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맥스터(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의 추가 증설이라는 또 다른 부담이 시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 시민들은 정부를 마지막으로 신뢰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지난 20년간 방폐장 유치로 얻은 결과와 남겨진 과제를 평가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세미나는 단지 회고를 넘어, 미래세대에게 어떤 도시를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도였다. 과거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과장된 유치 홍보가 오늘날 얼마나 냉엄한 현실 평가로 돌아왔는지는, 세미나에 참여한 시민과 전문가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한수원 본사 유치, 3,000억원의 인센티브 수령이라는 성과는 있었지만, 당시 약속된 유관기관의 경주 이전은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이런 상황에서 제4기 위원회의 출범은 단순한 형식적 절차가 아닌, 정책 결정의 방식과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경주는 이제 원전 정책의 ‘피동적 수용지’가 아닌, ‘능동적 결정자’로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위원회가 그저 명목상의 자문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 권한과 영향력을 가진 시민 거버넌스로 작동해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며, 시민사회 역시 단순한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대안과 비전을 함께 제시하는 ‘동반자’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