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희 (수필가 · 칼럼니스트)한 계절이 저물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꽃이 남긴 향기보다 먼저, 시들어버린 꽃잎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는 봄도 있습니다. 마른 바람이 부는 길목마다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꽃잎이 분분히 흩날리건만, 그 향기는 오염되고 악취가 났습니다. 선거는 본디 주권자의 뜻을 담아내는 가장 신성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치열했던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 홀로 서서 반추해 본 그 속살은, 화려한 수사 뒤에 숨은 불투명한 얼룩들로 가득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치러낸 그 뜨거운 봄은 진정 누구를 위한 계절이었습니까.지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소명 하나로 당내 경선이라는 시험대에 올랐을 때, 도전자들이 바란 것은 정정당당하게 땀방울의 가치를 증명하는 공정한 무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출발선은 서기도 전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밀행(密行)의 장막 뒤에 머물러야 할 당원 명부가 은밀히 유출되는 현실 앞에서, 정보의 소외를 겪은 이들이 마주한 박탈감은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빛이 들지 않는 암실(暗室) 속에서 저들만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정치는, 선거의 생명인 공정성을 안개 속으로 흐려놓고 있었습니다.진정 마음이 시렸던 것은 당내경선이 끝난 뒤였습니다. 비밀투표라는 명목은 도리어 두터운 벽이 되어 후보의 눈과 귀를 철저히 가렸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는 감춰진 채, 오직 종이에 적힌 최종 통계 숫자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 비현실적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투명한 확인 과정도 없이 무조건적인 승복만을 강요하는 시스템은, 깨끗한 승복조차 건네기 어렵게 만드는 불신의 늪이었습니다. 과정이 투명한 유리창이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권력을 쥔 자들이 짠 각본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습니다.사전선거 당일 마주한 풍경 역시 서글프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길게 늘어선 관외 사전투표의 행렬과 달리 텅 빈 관내 투표소의 대조는 유권자의 흐름을 정교하게 예측하지 못한 행정의 단면이었습니다. 더 큰 안타까움은 본투표 날 들려왔습니다. 현장의 세심하지 못한 준비로 인해, 긴 대기 줄 앞에서 소중한 참정권의 기회를 아쉽게 놓치거나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이웃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주권자의 권리가 행정의 사소한 틈새로 인해 온전히 발현되지 못했다는 소식은, 우리 선거 관리 체제가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방증하는 씁쓸한 풍경이었습니다.지금 정치권은 오직 당선이라는 달콤한 축배에 취해 입을 닫고 있습니다. 주권자의 권리가 흔들렸음에도 승리의 도취에 빠져 그 이면의 부실함을 외면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절차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선거는 국민의 마음에 불신의 씨앗을 뿌릴 뿐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눈을 감아버릴 때, 우리가 믿어온 세상은 조금씩 무너져 내립니다.지금 우리가 피땀 흘려 가꾸어 온 민주주의의 나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쥔 자들의 뼈저린 성찰과 전면적인 제도적 쇄신이라는 거름이 없다면, 우리가 쌓아 올린 이 찬란한 탑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선거의 계절은 저물었으나, 가슴에 박힌 얼룩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디 이 위태로운 흔들림이 무너짐이 아닌, 더 단단하고 투명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진통이기를, 그리하여 다음 봄에는 진정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