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23일 김민석 국무총리가 주재한 ‘2025 APEC 종합점검회의’는 정부와 지자체, 민간이 함께 머리를 맞댄 전방위 준비체계를 점검하는 상징적 자리였다. 김 총리는 “이번 APEC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문화적 품격과 기술 역량을 세계에 증명할 기회”라며 성공적 개최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회의장 밖 현실은 복잡하다. 행사를 준비하는 최전선에는 경주시청과 경상북도청의 수많은 일선 공무원들이 있다. 대규모 국제행사인 만큼 인프라 구축, 프로그램 기획, 시민참여 유도, 안전관리 등 실무 과제가 폭주하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과 압박’이 아니라, 실질적인 예산 지원과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번 회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국민이 만드는 APEC”이라는 총리의 언급이었다. 실제로 정부는 이번 행사를 국민 참여형 외교의 장으로 삼기 위해 시민 서포터즈, 청소년 외교체험, 문화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이 모든 프로젝트의 실행 주체는 결국 지역의 실무자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산 확보나 기획 자율성이 부족할 경우, 이러한 이상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행사 준비가 아니라 사람 접대에 치인다”는 하소연을 종종 한다. 중앙 부처와 국회, 외부 민간 자문기관, 언론사, 정치권 주요 인사들의 방문이 잇따르며 실질적인 업무 차질이 발생하는 것이다. 점검이라는 이름으로 현장을 찾는 ‘관람식 방문’은 실제 도움이 되지 않으며, 보고서 준비와 동선 관리로 중요한 행정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보문단지를 중심으로 진행 중인 숙박시설 리모델링, 통역 시스템 구축, 관광 콘텐츠 개발 등은 지방정부 단독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과제다. 정부는 각 부처와 지자체 간 협업체계를 강조했지만, 그에 걸맞은 ‘예산 이양’과 ‘집행 자율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협업은 공허할 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노동’이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민들과 외부 방문객의 만족도는 결국 현장의 디테일에서 비롯되지만, 이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고충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일정이 다가올수록 ‘보여주기식 점검’과 과도한 의전 업무는 실질적인 준비 시간을 잠식하며, 본말이 전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APEC은 경주라는 역사도시가 대한민국 외교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일선 실무자들이 과도한 의전 부담이나 상급기관의 ‘성과 전시’ 요구에서 벗어나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준비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말하는 “K-APEC의 초격차”가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를 재점검할 시점이다. 그것은 화려한 공연이나 글로벌 CEO의 방한보다, 조용히 예산을 배정하고 불필요한 현장 간섭을 줄이며 실무자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번 APEC의 유산은 무대 위의 반짝이는 순간이 아니라, 무대를 만든 이들의 진심과 노동이 남긴 흔적일 것이다. 우리가 성공을 말하려면, 그 시작은 바로 지금, 실무자들의 자리에서부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