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희 < 수필가. 전 시의원 >은빛 스크린 위로 아득한 바다의 물보라가 흩날리고, 십수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고향 이타카의 바닷가에 엎드려 흙냄새를 맡을 때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극장 안을 채운 어둠 속에서 나는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가만히 짚어보았다. 트로이의 목마를 성공시킨 영웅이었지만, 그가 그토록 거친 파도 속으로 끝내 내몰고, 다시 끌어당긴 것은 찬란한 면류관도 웅장한 궁전도 아니었다. 오직 아내 페넬로페가 밤새 피워 올리던 등불, 아들 텔레마코스의 아련한 숨결이 남아있는 작고 온화한 집, 바로 그 가정이 그가 숨을 쉬는 이유이자 세상의 전부였던 까닭이다.오디세이아가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가슴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단순히 신화 속 모험담이어서가 아니다. 20년이라는 긴 고독 속에서도 지혜와 절개로 자리를 지켜낸 강인한 아내,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 위에서 소년의 허물을 벗고 어른으로 성숙해간 아들, 그리고 이들을 향해 꺾이지 않는 의지로 노를 저었던 가장의 서사가 우리 삶의 근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그 어떤 폭풍우도 꺾지 못하는 영혼의 안식처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지탱하는 존엄의 시작점이다.그러나 극장을 나와 바라본 오늘날의 현실은 오디세우스가 헤매던 아득한 바다보다 더 위태로워 보인다. 정치권이 앞다투어 외치는 `정상가족 탈피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공공정책 사업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가장 기본적인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장애인 탈시설이나 노인공동체 임대주택 사업 같은 정책들은 언뜻 듣기에 포용적이고 따뜻한 복지처럼 포장된다. 홀로 남은 노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냐는 감언이설은 달콤하다. 하지만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해체하고, 비혼과 동성혼을 넘어 자식도 책임도 없는 임의적 공동체에 기존 가족과 동등한 지위와 재산권을 부여하겠다는 발상은 결국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배우고 체득하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효와 책임이라는 도덕적 질서는 사회라는 큰 집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이 기둥을 썩은 것으로 치부하며 `대체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가 지켜온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온기는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다.국정을 책임지는 이들에게는 사회적 정의감과 백년을 내다보는 공심(公心)이 필요하다. 눈앞의 표를 얻기 위한 패거리 정치와 편의주의적 정책으로 미래의 기반을 갉아먹는 일은 결코 정치가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그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것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확신, 즉 가족에 대한 신의였다.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어둠 속에서 다시금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타카를 향해 가고 있는가. 가정이라는 따뜻한 울타리가 해체된 사회에 영웅의 귀환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오디세우스의 길고 긴 여정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엄중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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